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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는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무진박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 김영석은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도는 신세로 지내다 1895년 경북 칠곡에서 어머니 서중하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여덟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옹기는 그 중 막내였다.
보통학교 재학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살림이 어려워 졌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그의 꿈을 소박했다. 상점에 취직해서 장사를 배워 상인이 되고 싶어 했다. 25살에는 결혼을 해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알콩달콩 살고 싶어 했다.
그러니 한 가정을 책임지려했던 이 아이가 훗날 한 나라의 정신적 안식처로 추앙받는 김수환 추기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머니의 권유로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안동성당에서 첫 사목생활을 시작해 1969년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마흔일곱의 세계 최연소 젊은 추기경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박정희 정권부터 5공 6공 시절을 거치는 독재정치에 대한 거침없는 쓴 소리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되자 박정희와 직접 면담해 지 교수의 석방을 얻어냈으며,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도 서명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추모사 낭독에서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으로 장기집권의 야욕이 빚은 참극을 꼬집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며 명동 대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버틴 일화도 회자되고 있다.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이 땅의 민중과 함께 했다. 탄압과 억압의 역사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정의와 인권을 위해 싸웠으며 사랑의 실천적 삶은 죽음 앞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막을 기증해 두 사람에게 밝은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고 7년 전 오늘 선종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들과 함께 해준 성직자였던 김수환 추기경.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자만과 교만에 쌓였던 우리들을 되돌아보게 했던 ‘바보 김수환’의 똑똑한 가르침은 큰 교훈으로 남았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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