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35년을 살았습니다. 영화 ‘아리랑’은 그가 24살에 만든 영화입니다. 20살에는 독립군에서 활약 했다고 합니다. 그는 감독이자, 배우, 각본까지 모두 해낼 수 있었던 당시의 멀티 플레이어였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누구인지 감이 오시나요?
▲나운규 감독 |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구자였던 춘사(春史) 나운규입니다. 그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감독이자 배우였고, 어린시절부터 춘원 이광수의 작품의 많이 읽어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춘원은 훗날 친일 문학가로 전락하고 말지만….)
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아리랑을 외칠 겁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얼을 부활시켰던 그의 업적은 영화사뿐 아니라 민족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리랑의 시작
아리랑,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1926년 조선은 일제에 의해 탄압 받았던 시기입니다. 민족의 얼은 억눌려 가슴에 맺혀 있었고, 민족의식은 점차 퇴색되어만 갔을 겁니다. 힘없는 나라가 싫어 떠난 사람, 돈을 주고 일본제국의 황민이 되어 버린 사람, 조선인을 탄압하며 오히려 일본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앞잡이들까지….
이렇듯 조선의 하루하루는 암울했습니다. 그때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 ‘단성사’에서 개봉합니다. 그 당시 관객은 무려 15만명. 영화는 2년 이상 전국에서 상영되며 관객을 모았고, 조선인들의 가슴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게 했을 겁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나운규 감독은 민요 아리랑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국을 잃은 조선인들의 울분과 설움을 필름에 담아냈습니다.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주인공 영진이 일본 순사에 잡혀가면서 민요 아리랑이 흐르고 영진은 고개를 넘어갑니다. 영화를 보던 조선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리랑을 함께 따라 부르며 통곡했다 전해집니다.
무성영화 초기에서 볼 수 없는 커터백과 환상적인 몽타쥬는 그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영화적 수법을 나운규는 그의 첫 영화 아리랑에서 보여줍니다.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영화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광인과 변절자로 대변되는 조선
영화 속에서 광인(狂人)으로 나오는 주인공 영진은 3·1운동 당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자가 된 민족청년으로 묘사됩니다.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올바로 살 수 없었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 당시의 조선인들은 꾸역꾸역 살아가고는 있지만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겁니다. 반면 영진과 대립하는 기호는 일제에 아부하는 반민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버린 변절자들과 일맥상통하죠.
앙숙관계인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청춘남녀가 사막에서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로 조선을 억압하는 일본의 모습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자 각본까지 맡았던 나운규의 꿈이기도 했겠지요. <2편에 계속>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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