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작은 어린이는 눈이 작아서 귀엽다
이가 빠진 어린이는 이가 빠져서 예쁘고
왼쪽 오른쪽 신발을 바꿔 신는 어린이는 신기해서 예쁘다
모두모두 다르게 크는 어린이
누가 누가 잘하나 기죽이지 말고
밝게 곧게 무럭무럭 자라게 하자
-첫 동시집 까치나무 중 '다르게 크는 어린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흔두 살의 노인이 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23년을 지낸 그는 65세에 정년퇴임을 하면서 생의 첫 번째 동시집 '까치나무'를 세상에 냈다.
교육자에서 시인 송근영(92)으로 인생 제2막을 연 지 30여년이 흘렀다. 그의 동시들은 그가 평생을 함께한 아이들과 많이 닮아있다. 작품은 곧 그 작가요, 시인 역시 아이들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특히 동시를 읽을 때가 그러했다.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하고 조르듯, 어린아이처럼 시를 읊는다.
1925년 혼란스런 때 태어난 그는 어느새 구순을 넘긴 노인이 됐다. 검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희고 눈도 귀도 점점 침침해져 가지만 그의 마음 한켠엔 여전히 '어린이'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 마음이 새해 벽두 또 한 권의 동시집으로 세상과 만났다.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2016)가 그것이다.
13일 오전 10시 30분께 대전 대덕구 오정동에 위치한 시인의 집을 찾았다. 지은 지 20년은 돼 보이는 3층짜리 연립주택 2층이 그의 집이다. 구순이 넘은 시인은 외출할 때마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시인의 집 현관문 앞에는 지팡이 두 개가 벽에 기대 있었다.
현관을 두드리자 느릿느릿 송 시인이 손님을 맞이했다. 며칠 새 영하로 떨어진 기온 때문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시인은 먼저 일기장이 있는 작은 방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책장 빼곡하게 꽂힌 양장 다이어리엔 신문 기사 스크랩과 그날그날의 기록들이 적혀있었다.
또 다른 작은 방. 책상 하나와 이부자리가 깔려 있다. 책상 맞은편엔 젊은 시절 자신의 사진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직접 적은 메모가 액자 하나에 모자이크 돼 있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아프면 걸어라. 죽을 각오로 걸어라.” 그가 92세의 나이에도 동시를 쓸 수 있는 이유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송 시인은 198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서 '새벽 눈길'이란 시로 등단했다. 이로부터 5년후엔 월간 '아동문예' 신인작품상 동시부문에 당선됐다. 또 5년 후인 2000년에는 시인의 동시 '우리집'이 중학교 1학년 도덕 국정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 1일 출간된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 |
시인은 지난 추석 지금은 전부 커버린 손주들을 보며 동시집의 대표작인 '우리 손자 말 한마디가'를 썼다.
즐거운 추석 명절도 지났다/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손자 말 한마디가/가족 사랑을 가슴마다/새삼 찡하게 안겨 주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손자가/이런 예쁜 말이 어디서 나올까?”/ “이 녀석 눈 똑바로 박힌 것 좀 봐요/큰 일 할게다“/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은 끝이 없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손을 흔든다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 중 '우리손자 말 한마디가'
송 시인은 “손주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왔다가 할머니한테 안겨 집에 안 가면 안 되냐고 묻더라고.
다 큰 손주를 보다가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정을 모르는 요즘 사회모습 풍조를 지적하고 이런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시인은 자식과 손주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한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아낌없이 담아냈다.
그는 “어머니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인호 작가가 '왜 작품에 어머니가 자꾸 나오냐고 (독자들이) 묻는데 어머니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답했는데 나도 똑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또 “생전의 어머니는 늘 나에게 '으뜸가는 공부는 참는 공부이니라'를 강조했었다”며 “박속'만큼 깨끗하셨던 분이었다”고 어머니를 회상했다.
이번 동시집에서 시인이 조금 더 애착을 느끼는 시도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아이가 된다더니/그 말이 꼭 맞다
왠지/허전하고/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가뜩이나/아플 땐/아이고, 엄마소리가/저절로 나온다
문득 어릴 때 보았던/울며 엄마 품을 떠나던/송아지 생각이 난다
음매! 음매…!/나도 울면 안 되는 걸까?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 중 '엄마 생각'
구순을 넘긴 시인은 '엄마 생각'이라는 동시를 통해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플 때면, 또 그렇지 않을 때에도 가끔은 '엄마 품을 떠나던 송아지'처럼 소리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이다.
'피천득 할아버지'라는 동시에서는 97세까지 살았던 피천득을 언급하며 '하나도 때묻지 않은 아기셨어요 편안한 얼굴은 천사와 다름이 없으셨고요. 어쩌면 그렇게도 욕심이 없고 웃음이 많으셔요'라는 시구를 통해 페르소나를 밝히기도 했다.
송 시인은 “성인시보다 어린이 마음으로 쓰는 동시가 더 좋다”며 “요즘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공부해 나를 살찌워 작품을 내놓고 싶다”고 말했다.
▲ 송 시인이 매일 스크랩하는 신문노트 |
며칠 전 송 시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거짓 없는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시기 때문에 송 시인님은 늘 소년입니다. 소년의 머리에서 나오는 참신한 생각들이 동시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동시집을 책꽂이 가장 가까운 곳에 놓고 자주 열어보면서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다'는 내용도 함께 있다.
송 시인은 “내가 쓴 작품을 누군가가 읽어주고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게 삶의 보람이 돼 더 좋은 작품을 내놓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며 “'아흔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동심을 가지고 시를 쓰면서 정직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임효인 기자 hyoyo@
●송근영 작가는…
1925년 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출생
1945년 전주사범대학 심상과 졸업
1945-90 초등학교 교사ㆍ교감ㆍ장학사ㆍ교장 역임
1985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0 아동문예 작품상 당선
대전시 문화상 교육부문 수상
제24회 대전문학상 수상
1977년 충남대 교육가족 운동회 노래 가작
1978년 충남도 도민의 노래 가작
2000년 동시 ‘우리집’ 국정교과서 중학교 도덕1 154쪽 수록
발간
1990 교육 수상집 ‘우리 선생님의 환한 미소’
동시집 1990 ‘까치나무’
2003 ‘좋으면 좋다고 하자’
2014 ‘사랑아 솟아라 퐁퐁퐁’
2016 ‘할머니,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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