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군이 스러졌던 1894년 우금티고개
무령왕릉·송산리 고분은 경외감으로 빛나지만
위령탑은 쓸쓸히 서 있어
승리한 자의 기록과 잊혀진 구국의 외침
지금을 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4,50년 전만 해도 땅을 파면 탄환이 나오고 그랬어. 지금은 안 나와.” 공주 우금티고개로 향하던 중 금학도장골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이 해준 말이다. 올들어 가장 추운 강추위를 가르며 찾아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초라했다.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전날 내린 눈을 밟으며 조심스레 위령탑을 둘러봤다. 돌에 새겨진 글귀를 보니 1973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짓이겨진 글자가 있어 자세히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5.16혁명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자신의 군사쿠데타를 성스러운 동학농민혁명에 비유하다니. 야트막한 우금티고개는 언제 생겼는지 터널이 뚫려 공주와 부여를 오가는 차소리가 쉴새없이 들린다. 이 고개를 학창시절 매일 버스를 타고 지나다녔지만 그때는 몰랐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일본군·관군과 맞서 싸우다 패한 통한의 공주전투의 역사적 전적지라는 걸.
1894년 꼭 이맘때였다.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외치며 서울로 진군하던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처절하게 쓰러졌다. 그날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서성이고 있다. 두겹으로 낀 장갑과 입을 가린 마스크를 벗자 에일듯한 찬바람에 금세 손이 얼어붙는 듯하고 콧물이 흘러내렸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동학군의 울부짖음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한자씩 쌓인 '삼남에 내리는 눈' 속에서 동학군은 행군했고 해어진 짚신을 신고 눈구덩을 누볐다. 한손으로는 주먹밥을 입에 쑤셔 넣고 다른 손으로는 조총이나 죽창을 들고 내달렸다. 그러나 신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이 버티고 있는 우금고개에서 동학군은 추풍낙엽이었다. 동학군의 시체가 산을 가득 메웠고 개울에는 피가 가득 고였다. 오죽하면 논배미속의 송장이 하도 많아 지금도 그 논을 두고 '송장배미'라 부를까.
제민천을 따라 공주시내를 가로질러 무령왕릉으로 걸어갈 참이다. 옛날엔 지저분한 개천이었는데 말끔하게 조성된 제민천 산책로를 걸으며 옛 추억에 잠겼다. 지금은 없어진 중동에 있었던 분식집 '풍미당'은 만남의 장소였다. 음식 종류가 없는게 없는 싸고 맛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여고 졸업후 10년만에 다시 찾은 공주에서 친구와 목욕을 하고 1차로 떡볶이, 쫄면, 칼국수를 먹었던가? 그리고 2차로 왕만두 두 개를 시키니까 주방장의 눈이 왕방울만해져 우리는 황당해서 왜그러냐고 물었다. 계산을 하고 나가는 우리에게 90도 각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던 주방장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먹었나요?'
▲가는길=대전에서 승용차로 30분 걸리고 버스로 갈 경우 구 터미널 가는 걸 타야 수월하다.
▲먹거리=금강변 공산성 앞 식당가엔 맛집이 많다. 유명한 이학식당도 있고 맛있는 육회 비빔밥집도 있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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