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교는 서울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다리로, 1932년 1월 2일에 착공해 1933년 10월 23일에 준공했다. 철교가 없던 시절에는 배를 연결해 왕래했지만, 비가 올 때에는 금강 수량이 늘어 통행이 어려웠다. 마침 1932년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맞물리면서 공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철교가 건립됐다. 덕분에 서울에서 호남으로 가려면 공주를 거쳐야만 했다.
완공될 당시 길이는 514m, 폭은 6m였으며, 교각의 평균 높이는 20m였다. 준공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였고, 최첨단 공법으로 건설돼 교량 건설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아픔이 많았다.
1933년 11월 개통된 금강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중요한 거점이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한 지 10여일만인 1950년 7월 12일 공주에 다다랐다. 당시 이곳은 미8군 제24사단 34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강은 한강 이남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요새였다.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미군은 금강교 폭파를 결정했다.
대전지역 사수를 명령받은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엄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1950년 7월8일 미군이 천안 전투에서 패배하자, 금강 방어선에 집중시키기 위해 금강을 건너 진지를 구축하고 강 하류에 있는 나룻배를 모두 파괴하고 7월12일까지 금강교까지 폭파시켰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철교에 이어 두 번째로 폭파된 철교가 됐다.
금강교의 3분2가 파괴되자, 북한군은 우회해 검상리 방면으로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도하했고 미군은 34연대는 또다시 논산으로 후퇴했다. 미군은 별다른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결국 최후의 방어선이던 낙동강까지 밀리게 된 것이다.
파괴된 금강교는 1952년 복구공사에 착수해 1956년 9월 준공됐다. 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던 유일의 교량 역할을 해왔다. 2001년에 공주시 쌍신동과 금성동을 연결하는 '백제큰다리'(725m)가 금강철교 아래 세워지면서 금강교는 안전 보강과 공산성 등과 연계한 관광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2002년 보수공사에 들어가 2003년 3월 또다시 완공돼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세종=윤희진 기자 heej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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