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하늘아래 가장 정직한, 땅의 맨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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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하늘아래 가장 정직한, 땅의 맨 얼굴

진흙으로 만든 3㎞ 제방, 쌍룡의 웅장함이 자리 빛내 칼로 자른듯한 지평선보다 나무 한그루, 창고 하나로 더 풍요로운 풍경

  • 승인 2015-11-05 13:54
  • 신문게재 2015-11-06 9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주말여행] 김제 벽골제와 지평선

태풍이 조용했던 올해. 농심이 바싹 타들어간 가뭄이었지만 쌀 농사는 풍년이었다. 황금빛 가을을 물들였던 들판이 알알이 여문 쌀알들을 떼어내고 타고난 땅의 색으로 돌아가는 계절.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김제에는 봄여름동안 품었던 벼들을 떠나보낸 들판의 표정이 있었다.

지평선을 보러 온 여행자에게 김제가 특별히 관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늘과 땅의 평행선은 관광을 위해 그어놓은 게 아니라 농민의 풍경이다. 여느 소도시와 다를 것 없는 역 앞에서 시민들과 똑같이 버스를 기다리고 한참을 달렸다. 시장을 지나고 어느 작은 마을 어귀에 몇 번 정차하면서 알았다. 이 땅은 곧고 넓다. 작은 산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비를 교통카드로 내는 사람은 이방인 뿐. 버스의 고객들은 내릴 때 지폐나 동전을 내밀었다. 벽골제단지에 내리는 사람은 여행객 혼자였다.

김제시 부량면에 위치한 벽골제는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저수지다. 진흙을 이용해 제방을 쌓은 벽골제는 자기 크기의 3배에 달하는 논에 물을 대 김제 평야를 먹여 살렸다. 지금은 수문 두 개와 제방이 남아있는데, 3㎞에 달하는 제방은 올해 유난했던 가뭄 탓인지 물이 거의 없이 마른 땅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나팔과 옛 우물 도르래 모양의 거대한 장식이 들어서 있다. 벽골제 관광단지 내에는 움직여 볼 수 있는 수문 모형, 남원의 춘향이가 놀러와 탔을 것 같은 높은 그네, 디딜방아 등 전통과 관련된 체험거리가 많다. 옛 농경기구들과 민속용품 등이 전시된 농경문화 박물관도 있다.

사실 벽골제에서 꼭 만나야 할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요즘 사진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쌍룡이다. 2007년 만들어진 쌍룡은 각각 입에 여의주를 물고 마주 보고 있는데 둘을 합한 길이가 54m, 높이는 15m에 달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제방 100m 하류에는 청룡, 200m 하류 지점 웅덩이에는 백룡이 살아 벽골제를 지켰다고 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철이나 동으로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대나무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푸른 하늘, 금빛 제방과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그 자리에서 솟아올랐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조화로웠다.

벽골제와 농경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농경사주제관 3층 전망대에 올라보니 사방의 관광지를 표시한 안내판이 있었다. 11시 방향으로 가면 지평선이 보인다는 글과 사진. 내려오자마자 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수평선의 색처럼 또렷하게 구분되는 선이 있는 걸까. 기대는 걸을수록 커졌지만, 30분쯤 지나자 의심으로 변했다. 완벽하게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선은 없었다. 야트막한 구릉이 간간히 나타나거나, 덩그러니 서있는 건물이 선을 방해했다. 이런 풍경도 지평선이라 해도 될까.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등 위로 햇살이 따가웠다.

그게 바로 우리의 지평선이라는 건 다시 벽골제로 돌아오며 깨달았다. 기계에 주로 의존하는 거대한 미국식 농경과 달리 한국의 농사는 사람 손이 많이 간다. 논과 논 사이 베어내지 않은 나무 한그루는 농부의 쉼터가 되어 주고 낡은 슬레이트 지붕 창고는 집이 먼 이들에게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농기구들의 보관처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관광객의 잣대로 기대하는,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이라면 풍요로운 들판은 만들 수 없다. 도로를 뚫고 자란 작은 꽃. 말려놓은 고추. 무얼 그리 찍느냐며 웃으며 지나가던 촌로의 얼굴처럼. 오래 걷는 관광객을 위로해주는 지평선의 풍경이었다.

벽골제에 어둠이 찾아오자 쌍룡은 청룡과 백룡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쌍룡 앞 안내판에는 소원을 빌어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용은 원래 물을 다스리는 존재. 이 빛 타고 하늘로 승천하거든 올해 가물어서 많이들 힘들었으니, 내년에는 알맞게 비를 뿌려 주기를. 농부의 얼굴에 웃음으로 번질 귀한 물줄기 되어 주기를.

▲가는길=서대전역에서 김제역으로 가는 기차가 하루 18대 다닌다. 내려서 맞은면 오른쪽으로 건너면 벽골제로 가는 버스가 있는데 시간이 불규칙하고 배차간격이 긴 편이다.

▲가볼만한 곳=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된 곳을 재현한 아리랑 문학마을이 인근 죽산면에 있다. 소설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둔 홍보관과 등장인물의 가옥, 하얼빈역도 만들어 뒀다.


글·사진=박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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