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관 “화선지에 스미는 먹물의 번짐 보면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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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관 “화선지에 스미는 먹물의 번짐 보면 희열”

대학 때 취미로 시작해 40년 외길… 이제는 인생의 전부로 예술은 돈이 전부가 아냐… 젊은작가들 전시장 마련 등 시급

  • 승인 2015-10-01 14:09
  • 신문게재 2015-10-02 11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인터뷰] 가은 서성관 (서예가)

▲ 서성관 서예가
▲ 서성관 서예가
하얀 화선지에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한 획씩 써 나갈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짜릿한 맛이다. 가은(佳隱) 서성관(58·사진)은 서예의 참 맛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학교 1학년 붓의 이끌림에 끌려 취미로 시작한 서예는 그의 인생 전부가 됐다.

고집스럽게 서예의 길을 걸어온 지 40여년. 불후의 명작을 남겨보겠다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겠다는, 그의 서예 인생 출발점에서의 당찬 다짐은 서예의 맛을 널리 알리고, 작품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성숙한 자신과의 약속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가은 선생과 함께 붓을 잡아온 사람들만 해도 70여명, 이 중 20년이 넘는 회원들이 다수다.

서예라는 외길을 걸어온 가은 선생의 앞길은 뻔히 정해져있다. 앞으로도 붓을 계속 잡겠다는 가은 선생에게서 외고집이 느껴졌지만, 그의 열정과 자부심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매일 먹을 갈며 작품에 대한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하다는 가은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편집자 주>

-서예와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었나.

▲충남대 입학 후 서예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서예를 시작했다. 전공은 원예학이었지만, 취미로 서예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상하게 서예가 끌렸다. 서예반 활동을 열심히 하던 중 1979년 전국 대학생 미술 전람회에 노산 이은상 선생의 '가고파'로 출품했다. 장려상을 받아 덕수궁에서 작품이 전시됐었는데, 큰 영광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미술제에도 입선하며, 서예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 처음처럼
▲ 처음처럼
-서예를 어려서부터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닌 대학 때 취미로 시작한 것인가.

▲그렇다. 초등학교 다닐 땐 학교 과목 중에 서예가 있어 붓을 잡을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서 잘한다는 얘기를 듣곤 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입시에 치여 서예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만 했을 뿐이었다. 대학진학 후 어렸을 때 붓을 잡았던 느낌 때문일까. 한번 다시 써보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서예반 동아리를 찾았다. 붓을 잡으면 마음이 편했고, 알지 못하는 두근거림이 마음속에서부터 일었다.

-취미로 시작한 서예가 어떻게 인생이 됐는가.

▲사실 졸업할 때까진 서예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원예학을 전공한 만큼, 조경기사 자격증을 따보려 노력했고, 취업문도 여러 번 두드려봤다. 그러나 서예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예를 3~4년 정도 하다보면 묘한 끌림이 점점 강해진다. 먹물에 붓을 찍어 화선지에 쓸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그 느낌에 중독됐던 게 아닌가 싶다. 아까 말했듯이 여러 대회에서도 입상하면서 결코 쉬운 길이 아니지만 서예를 전문적으로 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서예를 전문적으로 하면서 어려운 점이 많지 않았나.

▲어려웠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지금처럼 대학 전공이 아니었던 서예를 전문적으로 시작하려면 스승을 만나 배운 후 때가 되면 독립해 서실을 차리고, 외부 강의를 나가는 게 정석이었다. 당시 서예반 지도 교수셨던 조종업 한문학과 교수님과 동아리 선배였던 장암 이곤순 선생께 배웠다. 서예도 결국 공부였으니까. 그러다 1986년 드디어 도룡동에 나만의 서실을 차렸다.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가르치고, 외부 강의도 나가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더라. 이 시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작품에 미친 듯이 열중한 기간이기도 했다.

-처음 서실을 열었을 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게 있었을 것 같다.

▲서예가로서 국전 초대작가가 되겠다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보겠다는 다짐까진 아니더라도 생각이 있었다. 서실을 운영하면서 작품 활동까지 하느라 정말 힘들고 바빴다. 하지만 국전에서 특선 2번, 입선 5번을 하며, 1996년부턴 초대작가로서 작품을 냈다. 1986년에 서실 문을 열었으니 10년이 걸린 셈이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예술가는 작품이 중요하지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나만의 진정성과 열정, 애정이 담겨야만 진정한 작품이 아닐까.

-그 서예의 맛이란 어떤 것인가.

▲서예는 해보지 않으면 그 맛을 평생 느끼지 못한다. 서예는 먹을 갈고, 붓을 잡고, 쓰고, 이 과정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다. 먹을 갈며 작품 구상은 물론 마음을 정화한다. 이후 붓에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한 획을 써 나갈 때 먹물의 번짐을 느껴야 한다. 순간순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희열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정말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작품을 완성한 후 벽에 걸어놓은 뒤 마시는 커피 한잔이 가장 맛있는 차라고 하더라. 이때의 커피향은 어느 차에 못지않은 향을 느낀다. 설명이 되려나 모르겠다.

-최근 서예계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원광대에 처음으로 생겼던 서예학과가 폐과됐다. 계명대와 대구예술대도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들었다. 지역에선 대전대 서예과가 명맥을 잇고 있지만, 취업논리에 밀려 어려움이 클 것이다. 처음엔 꿈을 갖고 붓을 들었지만 막상 졸업하고 할 게 없으니 전과나 편입하는 학생들도 많다. 전공뿐만 아니라 동아리도 문제다. 예전엔 대학 서예부 동아리 연합회가 결성돼 교류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이 이뤄졌지만, 지금 서예 동아리가 유지되는 곳은 충남대 빼곤 거의 없다.

-결국 돈이 되지 않으니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얘긴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서예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히 생활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렇지만 예술은 꼭 특별한 목적을 갖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취업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간직할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예산의 몇 프로는 매해 예술가 지원에 쓰이도록 정하고,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전문적인 전시장 마련이 시급하다.

-앞으로도 서예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딴 길 안 파고 되는대로 붓을 잡아왔다. 서예 하나로만 말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이 길만을 갈 것이다. 방금 말한 서예의 맛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커피숍을 운영하고, 취미로 서예를 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내 전부를 쏟아 부어도 어려운 게 예술인데, 병행한다는 게 어려울 뿐더러 작품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열정과 고뇌, 번민이 없으면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아기를 낳기 위해 산모들이 고통을 참으며 순산하듯 작품을 위한 고통과 피나는 노력 등을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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