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아픈 역사 보듬느라…시간도 더디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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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아픈 역사 보듬느라…시간도 더디가나 봅니다

군산세관 등 즐비한 근대 건축, 일제가 수탈한 쌀 나르던 항만 멀지 않은 시대의 상처 곁엔 조건없이 베푸는 이들의 위로가 있어

  • 승인 2015-10-01 13:47
  • 신문게재 2015-10-02 9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주말여행] 군산 근대산업유산 기행

▲ 군산 내항의 부잔교(뜬다리)
▲ 군산 내항의 부잔교(뜬다리)
오라는 비는 안 오고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뙤약볕을 손으로 가리며 찾아간 곳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다. 3층으로 된 건물로 해양물류역사관, 특별전시관, 근대생활관 등 오밀조밀 잘 꾸며놓았다. 그러나 날을 잘못 잡았구나 하는 낭패감이 들었다. 익산에서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왔다는데 이건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다. 우당탕탕 쿵쾅, 이리뛰고 저리뛰고 뭐 하나 제대로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떨면서 아이들을 제재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짜증이 슬슬 밀려오면서 더위까지 겹쳐 더 있다간 나야말로 꽥 소리지를 것만 같았다. '이런 오살할!'

이름하여 근대산업유산벨트라 명명된 옛 조선은행, 18은행, 군산세관 등 근대건축물을 보는둥 마는둥 서둘러 보고나니 내 위장이 신호를 보낸다. '밥좀 줘.' 빈혜원이라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 짬뽕이 맛있다는 얘길 듣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나가는 두 남자에게 물으니 내부수리 중이라 문을 닫았단다. “어떡하나” 했더니 자기들도 점심 먹으러 간다면서 같이 가서 먹자고 이끈다. 정갈한 한정식집이었는데 처음 먹는 음식이 나왔다. 살이 통통한 아삭한 콩나물에 무를 납작하게 썰어넣고 닭고기를 찢어 넣은 말간 국이었다. 아주 시원하고 담백해서 밥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

선급회사에 다닌다는 두사람은 예산이 고향이거나 대덕연구단지에서 근무했었다고 했다. 여행하다 보면 처음 만나는 사람도 알고보면 인연의 끈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금·토 놀고 일요일은 근무하는데 서비스직은 아니라하고, 무슨 일 하나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흥신소에서 일해요.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뒷조사하러 군산에 왔어요.” “그래서 수첩에 뭘 적은 거구나. 에이, 설마. 농담도 잘하시네. 허허.”

군산 내항에 있는 부잔교(뜬다리)는 일제가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설치한 항만시설이다. 부잔교는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로 인한 부두기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작됐다.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면서 조선민중을 철저하게 빨아먹었다. 그 중 하나가 쌀이었다.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가 한통속이 돼 악랄한 수법으로 소작인들로부터 고율의 소작료를 거둬들이며 쌀 증산정책을 폈다. 1930년경엔 조선에서 생산된 쌀 40% 이상이 헐값으로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부잔교 옆 째보 선창은 퇴락해가는 군산 내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 때 쌀 창고로 쓰였다는 낡은 건물들은 스크루 취급상가가 됐다. 안수철(49)씨는 건물의 높은 천장을 가리키며 “저게 일제 때 지은 목재 골조인데 지금도 짱짱해요. 우리는 금방 지은 건물도 바람 한번 불면 넘어가는데 그때 건물은 서너시간씩 두드려도 안부서져요. 우리가 피해의식이 있어서 무조건 욕하는데 배울건 배워야 한다고 봐요.” 늙은 어부의 술취한 목소리와 고깃배 몇 척이 정박해 있는 째보 선창가에서 바라본 군산 내항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쓸쓸함을 더했다.

군산은 인천·목포와 더불어 근대 건축물이 가장 잘 보전된 도시다. 그중 월명동은 적산가옥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적산가옥의 백미는 히로쓰 가옥이다. 이 목조주택은 포목상 히로쓰가 지어 살던 집이다. 2층의 본채와 금고 건물, 단층의 객실과 일본식 정원은 첫눈에 봐도 건축 양식이 뛰어나다는 걸 느끼게 한다. 피지배자들의 고혈을 짜내 호의호식하면서 이렇게 화려한 집에서 영화를 누렸던 히로쓰.

박범신의 소설 『외등』엔 '서산댁'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서산댁은 일제 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갔던 전력으로 매독에 걸려 때때로 신경발작을 일으킨다. 여자로서, 평생을 두고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던 잔인한 과거와 페니실린조차 쓸 수 없는 오래 묵은 성병으로 고통받는 서산댁. 서산댁이 살아온 인고의 참혹한 세월은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물려 있다. 아베의 '안보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일본의 적산가옥이 또 현재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대전 가는 저녁 7시 46분 기차를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차창 밖 명멸하는 불빛을 뒤로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자리에 앉자마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성당 야채빵을 쩝쩝거리며 순식간에 두 개를 먹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인간이 바로 학교다.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여행은 교육의 현장이다. 낯선 여행자에게 조건없이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에게서 감동받고 삶을 성찰한다. 따뜻한 밥 한끼 함께한 아저씨들, 길을 묻는 여행자의 손을 선뜻 잡는 월명동의 마음 따뜻한 노부부. 그리고 역까지 가는 버스를 못 타 애태우는 나를 보고 헌털뱅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버스정류장을 찾아나서 준 할아버지.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심장이 딱딱해진 내게 온기를 불어넣은 그들이 바로 스승이다.

▲가는길=서대전역에서 오전 7시 50분 무궁화호가 있다. 1시간 30분 소요. 대전복합터미널에서 1시간에 1대꼴로 간다.

▲먹거리=짬뽕집 복성루가 유명하고 빈혜원은 내부 수리중이어서 못먹었다. 이성당 빵집의 앙금빵은 앙꼬가 너무 많아서 부담스럽고 개인적으로 야채빵이 맛있었다. 소고기무국도 맛있고 바닷가라 해산물도 많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woo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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