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입구는 대한문. 입장료는 1000원이니 퇴계 선생 한 분만 모셨다. 궁궐이 멀리 보이는 반듯한 길 옆 나무들이 푸릇푸릇하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선선해도 녹색이라면 아직 여름과 만나고 있는 기분이다. 오른쪽 덕홍전과 함녕전 추녀마루 위 토우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귀여운 마스코트 같기도 하고 빌딩숲에 갇힌 직장인의 초상 같기도 하다.
유럽같은 건물 석조전엔 유럽 관광지처럼 인파가 몰렸다. 황실의 공적인 업무와 가족 공간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창문 안쪽으로 주황색 빛으로 화려한 귀빈실이 보였다.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어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계단 아래엔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백일을 피는 여름꽃. 진분홍 꽃잎이 반쯤 떨어진 백일홍 앞에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사진찍기에 열중했다. 궁궐 구경보다 꽃구경이 더 한창인 모습에 웃음도 나왔지만 문득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년에 다시 볼 수 있는 꽃인 걸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역시 우린 안다. 헤어지고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붙잡아 두고픈 순간이 많은 게 삶이지 않은가. 꽃이 피어있고, 분수가 샴페인처럼 늦여름의 축포를 쏘아 올리는 오늘을, 우리는 사진으로 부여잡고 싶은 거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선득해진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이렇게 여름과 헤어지는 구나. 서울시청 별관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정동길.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이 쓴 우산이 동그라미가 되어 거리를 메운다. 그들 중엔 덕수궁에 종종 바람쐬러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도 누군가와는 평생을 만나지만 또다른 누군가와는 어느날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하지 않던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그 말은 맞았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헤어져야 했고, 꽃은 이별을 고하며 떨어졌으며, 우리는 여름과 헤어졌으니까.
그러나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헤어짐은 쓸쓸하지만 우린 가을을 만났고, 어느날 다시 덕수궁을 찾아 여름의 추억에 젖을 수 있을테니까.
▲가는길=열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서 지하철 1호선으로 한 개 역만 가면 시청역이다. 1번 출구로 나와서 163m만 걸으면 대한문이다.
▲먹거리=대한문 바로 옆에 줄서서 먹는 벨기에 와플 집이 있다. 궁 옆이니까 한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면 그 옆집인 할머니국수집을 추천한다.
글·사진=박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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