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일보가 올해 64주년을 맞았다. 1951년 9월1일 창간호로 틔운 '첫 싹'이 64년의 세월 속에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했다. 늘푸른 느티나무처럼 지역민과 함께 해온 중도일보의 64년 세월동안 반세기가 넘도록 중도일보의 영광과 성쇠, 속간의 감격까지 함께 해온 원로 언론인이 있다.
주인공은 안영진(85·사진) 중도일보 전 주필. 안 전 주필은 1958년 언론계 입문에 입문, 중도일보에서 편집국장과 주필,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1973년 강제폐간된 중도일보가 1988년 15년 만에 속간될 때도 함께 해, 그해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속간 후 첫 편집국장과 주필을 겸임했다. 퇴임 후에도 중도일보 지면을 통해 칼럼과 기획기사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영원한 중도맨'으로 기억되고 있다. 중도일보 창간 64주년 기념일(9월1일)을 앞두고 지난달 24일 안 전 주필의 자택을 방문, 중도일보의 지난 세월과 언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다. <편집자 주>
▲대전시 중구의 자택에서 만난 안영진 전 중도일보 주필. 책장 위에 1990년대 인도 취재시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
중도일보의 추억을 묻는 질문에 안 전 주필은 “15년 만에 속간된 1988년은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해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안 전 주필은 “1988년 초봄, 어느 일요일 이웅렬 회장께서 지팡이를 짚고 집까지 찾아오셔서 '자네와 내가 어떤 사이인가? 나를 도와줄 때가 안 됐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또 찾아오셔서 '뜻을 굳혔느냐?'고 물으셨다. 그 뒤로 속간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안 전 주필은 “1988년 9월 1일 중도일보가 속간하고 새롭게 출범할 당시 기자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지면구성(제작)과 외부필진 선정에도 큰 공을 들였다”며 “당시 속간호를 들춰보면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중도일보의 속간은 유폐를 딛고 일어나 부활하는 몸짓이며 새 시대를 여는 종소리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되돌아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속간 후 2년여 동안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을 오가며 주필로서, 편집국장으로서 종횡무진하는 가운데 안 전 주필은 당시 이름있는 칼럼 필진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평소 교분이 있는 명사들로 하여금 칼럼을 쓰게 해 당시 박찬종(대통령 출마자), 한승헌(감사원장), 문덕수(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회원), 성기조(시인, 국제PEN클럽 한국회장), 전철환(한은총재) 등의 글을 실으며, 지역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홍콩 특파원 박병석(현 국회의원)을 통해 '잠자는 대륙의 사자, 중공'을 들여다보는 기사까지 다루기도 했다.
“경암빌딩시대, 1960년대 중반~73년까지가 전성기였다”는 안 전 주필에게 그 시절은 기자들 모두가 의욕을 갖고 열심히 뛰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김종선, 이지풍, 민병구, 이혜태, 성기훈, 서정의, 조준호, 권오덕, 이재현, 신한철, 윤성한, 안영순, 김춘길, 이용웅 등이 한 시대 이 고장 언론을 주도했던 인물들로 꼽힌다.
중도일보는 문화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미인대회, 백마상 영화제와 가요제, 3·1절 기념 전국학생(중, 고)문예공모, 3·1절 기념 마라톤, 일본 속의 백제문화순례, 청소년 웅변대회 등 다양했다. 백마상(영화, 가요제) 시상식이 있는 날은 대전 시내가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였었다는 것이 안 전 주필의 설명이다.
당시 이웅렬 회장이 대전·충남지역 발전을 위해 10여가지의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했던데 대해 안 전 주필은 “가로림만 조력발전, 충청은행 설립, 충무체육관 건설, 계룡산 국립공원지정 등도 중도일보가 나서 추진했다”며 “당시 지역사회 개발 전담기자로 기사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화제가 1973년 강제폐간으로 옮겨가자 안 전 주필은 “그 무렵 중도일보는 충청인의 사랑을 받으며 전성기를 달렸지만 시시각각 외압이 가해졌다. 야성(野性)이 강한 지역 신문이었고, 이웅렬 회장이 충남 개발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마당에 군사정권은 눈엣가시로 봤고 강제폐간됐다”고 설명했다.
“1973년 봄 중도일보가 창간 22년만에 폐간사를 쓰고 문을 닫던 그 날은 20여 년 간 사원들이 피땀 흘려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는 안 전 주필은 “그 해 5월 24일자 신문을 끝으로 문을 닫았고 다음날 충남일보라는 새 제호로 대전일보와 합병됐다. 당시 기자들은 새로운 길을 찾거나 일부는 강제합병된 대전일보에 남아 기자생활을 이어갔다. 속간되기까지 15년간 중도일보는 동면(冬眠)이자 유폐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겨냈다. 그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 중도일보 앞에서 이웅렬 사장<사진 가운데>과 안영진 전 주필<맨 오른쪽>. |
신문사 편집국장과 주필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며 지역 언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전 주필에게 언론인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묻자 “여한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 전 주필은 “그 시절 고생도 했고 정권에 의해 감시도 당하고 했지만 행복했다. 그 시절 황금같은 지면에 대형기사를 수도 없이 썼다. 칼럼도 수없이 써 당시 쓴 칼럼이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다. 중도일보 오피니언 지면에 지난해까지 연재됐던 '직선곡선' 칼럼 코너도 본인이 만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해외출국 자체가 어렵던 시절, 안 전 주필은 일본 만 80여 차례 방문, 중국, 인도 등 외국으로 1백회 이상 해외취재를 다닌, 활발한 활동으로 언론계에 화제가 됐다.
1978년 한일의원연맹 동경대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김종필 단장과 함께 방일, 취재를 했으며 일본의 총리 등 정치지도자들과 학계 인사들을 만나 인터뷰와 현장취재를 했다. '일본 속의 백제문화'(기행문)를 신문에 게재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중도일보 속간 이후 1990년대 인도를 방문, 테레사 수녀와 인터뷰를 하고 테레사 수녀로부터 자필로 쓴, 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유럽을 탐방, '파리에서 내다본 동양예술'을 다루기도 했다.
안 전 주필은 “일평생 언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다만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수차례 셋집을 옮기며 이사를 다녀야했다. 술은 좋아해도 어디가서 옆구리 찌르고 돈받는 일은 없었다. 정보기관에서 뒷조사를 해도 나올만하게 없었다. 언론이 최소한 하수인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외상 연탄에 외상 말쌀까지 먹어야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불평없이 살아줬다.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어 안 전 주필은 “주위에서는, 언론계 생활을 화려하게 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 빈 수레가 철없이 너무나도 덜렁거리고 다녔구나'하는 걸 지팡이 짚은 요즘에서야 느낀다. 이제 철이 좀 가물가물드는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끝으로 후배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점을 묻는 질문에 안 전 주필은 “요즘 후배들은 글솜씨도 섬세하고 깔끔하고 감각도 참 좋다. 우리 때는 신문기자에겐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보다도 하나의 사명감 같은게 있었다. 시대상황도 그렇기는 하지만 요즘 후배 기자들은 샐러리맨, 월급쟁이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때는 문화부 기자도 시장에 불이 났다고 하면 자다가도 뛰어나갔다. 후배들도 좀 더 몸을 던져 뛰어보길 바란다”며 “일제시대 신문기자는 선구자요, 애국지사로 통했다”는 말로 짧지만 강한 일침을 놓았다.
김의화 기자 joongdonews1951@
●안영진 전 주필은
▲2011년 서산에 세워진 언론인 안영진 공적비 |
고향을 위해서도 힘써 고향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론인 안영진 공적비'가 2011년 고향인 서산시 성연면 자치센터 정원에 세워졌다. 이밖에 통일문제연구소장, 사회문제연구소장, 전국지방신문편집국장협의회 회장, 한국번역가협회 종신회원(일어), 아시아작가협회조직위원장(대전세미나 주최), 평화통일정책자문위(중앙상임위원), 국제PEN대전시위원회 초대 회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충남도문화상, 대전시문화상, 자유중국문인협회장상(공로), 국무총리 표창, 문학평론 신인상(문공부장관상), 한·일문화교류공로상(일본측으로부터), 문화예술대상(예총), 애향대상(향우회), 목요언론인클럽(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6·25전쟁에 참전, 전방의 철원에서 백마산 전투를 치렀다. 수색 중 숲속에서 기어가는 중공군을 덮쳐 생포했으며 그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기구의 사색, 백제7백년, 현해탄을 말한다, 한·일협력시대, 동서양의 명사들, 백제는 왜국의 유모였다, 안영진 전 주필의 중도일보 60년 그 때 그 현장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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