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목항의 커피거리 |
밤의 기운이 물러난 이른 아침의 버스터미널. 강릉행 버스표를 받아들고 설레는 맘으로 대합실을 왔다갔다 서성인다. 늘 그렇지만 여행은 익숙함이라는 안락함을 벗어던지고 나 자신이 확장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부스스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는 중년의 여자, 배낭을 메고 친구들끼리 깔깔대는 청춘들. 이 낯선 곳의 이 시간에 저들은 나와 무슨 인연으로 같이 호흡하는 걸까.
덩치가 시베리아 불곰같은 중년의 외국인 남자 둘이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분주히 대합실로 들어선다. '헬로, 유 노 차이콥스키 동성애자?' 다가가서 뜬금없는 질문이라도 해서 말을 트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면 영락없는 러시아 남자같은 저들은 동성애자를 문둥병 환자 취급하는 우리 목사님들처럼 싸다구라도 올려붙일 기세로 날 노려보려나?
7년만에 다시 찾은 강릉은 예전 그대로였다. 대합실 밖에서 찐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도 있고, 담장 너머 오랜지색 능소화도 그대로고, 사람들의 온화한 미소도 그대로였다. 다만, 퇴락해가는 고택의 쓸쓸함을 느끼게 했던 선교장이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양털같은 구름이 떠다니는 말간 하늘 아래 경포호에서 자전거를 타며 생각했다. '오늘은 여자든, 남자든 낯선 사람과의 짧은 인연을 만들고 싶다'고. 밥 한끼라도 먹으며 고단한 삶에 대해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었던 게다.
▲ 선교장 |
강릉 사천 바닷가에서 커피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씨도 삶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을 대할 때 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거라고요.”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버거움이 느껴졌다. 커피를 잘 못마시는 내게 카페인을 뺀 진한 블랙커피를 건네는 박이추씨의 배려가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커피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 커피의 대가 박이추씨의 커피를 마셔보겠다고 강릉까지 온 건 모험이자 객기였다.
내가 아는 진정 커피를 좋아하는 이가 있다. 나의 부모는 9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야말로 커피애호가시다. 일단 아침상을 물리고 노란색의 맥심 커피믹스를 한잔씩 타서 TV앞에 앉으신다. 달달한 커피를 홀짝이시며 아침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당신들만의 티타임을 즐기신다. 뜨거운 거를 잘 못드시는 엄마는 입으로 후후 불거나 스푼으로 저어 식혀서 국물 마시듯 후루룩 들이켜신다. 커피로 인해 운명과 팔자가 바뀌었다는 박이추씨. 자신에게 커피는 무엇이냐고 묻자 서로 발견하면서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협력관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강릉은 바다와 산과 물이 좋아 커피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했다.
▲ 한국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씨 |
영화 '리플리'에서 주드 로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장면은 참 멋들어진다. 아이보리색 리조트룩에 코발트색 눈동자를 한 주드 로가 손톱만한 '네미타스'로 진한 모닝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안목항의 커피거리는 명성답게 커피숍이 불야성을 이뤘다. 스타벅스, 할리스 커피 등 브랜드커피점도 있고 커피커퍼 등 강릉 토종 커피점도 있다. 전망좋은 3층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카푸치노를 마셨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싱그런 미풍이 커피의 깊은 맛을 더해준다.
강릉이 내게 선물한 깊고 진한 커피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 준영이와 마신 자판기 커피, 박이추씨가 건넨 질좋은 고급스런 커피. 그건 박이추씨가 커피는 행복을 먹는 거라고 했듯이 어떤 게 더 낫고 덜 나은 건 아니라고 본다. 삶에서 모든 답을 얻는 건 아니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내게 커피는 여전히 쓰디쓰거나 달디단 음료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슴에 불
▲가는길=대전복합터미널에서 간다. 3시간 20분 걸린다. 첫차가 6시 40분차다.
▲먹거리=경포호 인근 초당동에 순두부집이 많다. 두부찌개를 먹었는데 두부가 부드럽고 고소하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woo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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