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대구 김광석 길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이십대에 가졌던 기대나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며 살아야지 다독이면서도 스스로 한계들을 느끼면 다시 답답해집니다. 답답한 느낌이 들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김광석 에세이 「이해 다하지 못한」 중에서
▲서른즈음에=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 28살, 서른을 앞두고 떠난 첫 배낭여행은 마음이 정해준 곳에서 시작됐다. 외길로 뻗은 레일. 혼자였고, 오늘 하루만큼은 일상의 틀 안에 갇히기 싫었다. 사람들은 보통 대구를 떠올리면 막창과 같은 먹을거리나, 37도를 웃도는 무더위, 그리고 미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유독 가수 김광석이 먼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김광석은 한국 대중 음악계의 독보적 전설이자 세상을 떠난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가수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유난히 길었다. 대구행 기차에 오르자마자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던 김광석 노래를 다시 들었다. 가는 내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오랜만에 탄 무궁화 열차는 잔잔한 통기타소리를 내며 달렸다. 열차의 일정한 흔들림, 그리고 편안한 잠. 꿈속에서 낯익은 어린 아이와 마주했던 것 같다. 시점은 규칙 없이 변해갔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불과 몇 달 전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장소가 바뀌기도 했고 계속 같은 곳에 있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남짓 달렸을까. 이마에 흐르는 땀에 잠이 깨었다. 도착한 대구역은 상상 이상으로 더웠다. 생소한 역 출입구와 창 밖에 보이는 낯선 건물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주말 오후, 대구 중심가 동성로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20분 남짓 걸어 도착한 김광석 거리는 80~90년대 길거리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김광석 거리는 2009년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지역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350m 골목에 형성된 거리라고 한다. 길 초입부에서 마주친 김광석 동상은 금방이라도 노래할 듯 통기타를 메고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길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김광석의 주옥같은 명곡들이 흘러나왔다. '햇살이 눈부신 곳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 곳으로 가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거리를 적셨다. 생전 모습을 다양한 컨셉트로 그린 벽화와 함께 곁들여진 글귀. 익살스런 만화 그리고 애잔한 노래가사들. 평소라면 5분도 안돼서 걸어갔을 거리를 장장 2시간에 걸쳐 걸었다. 김광석 거리를 찾은 사람들은 주로 커플이었으나 조금 중후해 보이는 어르신도 벽 앞에 한참을 서서 그와 마주했다. 어릴 적 그가 뛰어놀았다는 골목.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낙서로 가득한 벽들. 혼자 걷는 길이었지만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순간 바람 따라 방랑하는 음유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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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한참을 걸으며 사진을 찍다보니 골목길 중앙부에 위치한 건물 지하에 작은 소극장이 하나 있었다. 그 앞에는 '해피싱어 채환의 콘서트'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공연 시간을 보니 미리 예매해둔 기차시간과 어긋나 아쉬워하던 찰나 우연히 지나가는 가수 채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부탁하여 공연장에서 노래 한곡을 듣고 잠시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는 누구보다도 김광석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김광석 노래에 물든 그는 20살이 되던 해 김광석을 만나게 되고, 김광석 거리에 있는 소극장을 기점으로 1997년부터 17년간 김광석이 기록한 1000회 콘서트를 목표로 공연을 해오며 작년 그 기록을 달성했다고 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김광석과 닮아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김광석의 향수가 묻어나는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애잔했다.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두 손에 꼭 쥔 통기타도 함께, 가늘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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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수 채환을 만난 후 대구에 사는 유일한 지인인 최백규 시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막국수, 녹두전과 함께 막걸리를 한잔하며 어둑어둑해지는 대구 방천시장을 바라보았다. 김광석 거리에 그려진 수많은 고인의 얼굴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만나서 반가웠다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날이 흐리더니 결국 보슬보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최 시인과 헤어지고 다시 홀로 남겨진 대구역 앞.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거리에서 내내 들었던 김광석 노랫말이 문득 떠올랐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이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멀어져 가는 김광석 거리를 바라보며 '이 노래가 생각날 때마다 자꾸만 길을 잃을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었다. 대전역으로 가는 내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그의 노랫말 덕분에 결코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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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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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길=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간다. 날씨가 좋아 조금 걷고 싶다면 김광석 거리를 걸어가도 좋겠다. 시간은 20분 남짓. 버스를 이용하려면 대구역에서 조금 걸어 나와 303-1 버스를 타고 방천시장(김광석 길)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은 반월당역에서 환승을 해야 하므로 초행길이라면 조금 번거롭겠다.
▲먹거리=김광석 길과 연결되어 있는 방천시장에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음식부터 대구명물 막창가게까지 몇몇 식당이 눈에 띈다. 김광석의 외가였으며 7살까지 살았다고 하는 방천시장은 생전에 공연이 없는 날 막걸리 한 잔하러 간혹 들렀다고 한다. 김광석 길을 중심으로 주변 골목에 예쁜 카페들이 많다.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 즐겨도 좋겠다.
박희준 기자 mylove5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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