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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최대의 비극, 6·25전쟁(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옛 대전형무소 우물을 시 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족상잔의 아픔과 증오를 품고 있지만, 민족 비극의 살아있는 증거로서 보존할 가치가 높다는 이유에서다.
13일 대전시와 한국자유총연맹 대전지부 등에 따르면 옛 대전형무소 우물은 1919년 5월 일제가 대전감옥소 개설 당시 재소자의 식수용으로 만들어졌다. 우물의 크기는 둘레가 6.3m, 깊이 12m, 직경은 2m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면서 대전형무소(1923년 명칭 변경)는 '인민교화소'로 사용됐다. 피란을 가지 못한 충남과 대전일대 공직자, 교사, 청년단원, 양민들이 수감됐다. 수감인원은 680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에게 인민군은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허위 자술서를 쓰게 했고, 이유 없이 구타했다고 전해진다.
비극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시작됐다. 전세가 역전돼 유엔군의 대전 탈환이 임박하자 인민군이 후퇴하기 전 수용자들을 집단학살했다. 학살은 1950년 9월 20일부터 26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방법은 잔인했다. 철사로 두 사람을 묶어 우물에 집어넣었다. 10여명의 인원을 집어넣고, 벽돌과 기왓장을 넣었다. 우물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또 10여명을 넣고, 벽돌을 채웠다. 생매장이었다. 우물뿐 아니라 감옥소 뒷산 골짜기에서도 학살이 자행됐다.
시신 수습 작업을 진행한 충남도청이 집계한 희생자수는 1559명이다. 하지만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보고서에 5000여명이 희생됐다고 밝혔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갑산씨는 6831명으로 증언한 바 있다.
당시 대전형무소엔 우물이 4개 있었지만, 현재 하나만 남아있다. 대전 교도소가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하면서 부지가 매각됐기 때문이다. 우물과 함께 남아있는 대전형무소 망루는 시 문화재자료 47호로 지정된 상태다.
옛 대전형무소 우물 소유주인 한국자유총연맹 대전지부는 우물의 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한국자유총연맹 대전지부 관계자는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반공애국지사와 양민들이 대전형무소 우물에서 학살됐다”며 “비록 좋은 기억을 간직한 곳은 아니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문화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는 우물에 대한 문화재 신청이 들어오면, 문화재위원회에 회부하겠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우물이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며 “현재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옛 대전형무소 망루와 함께 묶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고,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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