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금강따라 걷는 옥천
오늘은 작정하고 걷기로 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굽이굽이 유장하게 흐르는 금강을 따라 나의 특별한 하루를 일굴 참이다. 거기엔 바람과 햇빛과 그리고 여행자에게 따뜻한 미소와 물 한잔을 건네는 인정이 함께 할 것이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강 2교. 걷기여행의 출발지다. 가물어서 물길이 약하긴 하지만 수려한 산 사이로 흐르는 금강은 기품있고 도도했다. 물길 따라 걷는 길은 차도 별로 없고 오래전에 포장돼 바닥이 닳아서 옛길을 걷는 기분이다. 한발짝 두발짝 리듬있게 걸을수록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이 팽팽해지는 걸 느낀다. 어릴적부터 땅을 디디는 느낌이 참 좋았다. 여름날 어스름할 무렵 엄마는 밭에 가서 상추며 가지, 아욱을 뜯어오라고 하셨다.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맘에 속상했지만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걸음을 뗄 때마다 발목을 스치는 풀들의 감촉이 심통난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금강휴게소 건너편에서 낚시용품을 파는 정재춘 어르신은 옥천에 대한 자랑이 한보따리다. “옥천은 불이 잘 안나고 물난리도 안 당하고 물좋고 참 좋은 곳여. 여기처럼 고속도로 상·하행선이 같이 있는 곳은 없어.” 말투에 경상도 억양이 묻어 있어 고향이 궁금했다. “옥천에서 났는데 일찍 부산 가서 살았지. 한 40년 살다 25년전 여기로 왔어.” 그러면서 도리뱅뱅이라는, 피라미를 프라이팬에 구워먹는 요리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다. 도리뱅뱅은 술안주, 밥반찬으로 일품이라며, 이곳에서 처음 생긴 거란다. 어르신 얘기가 길어지자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빨리 볼일 보러 가자고 소매를 잡아 끈다.
시끌벅적한 금강휴게소를 벗어나자 한적한 길이 이어진다. 대지를 휘돌아 감싸며 흐르는 금강 변엔 드문드문 집들이 박혀 있다. 길 옆 비탈면에 아담하게 지어진 집이 예뻐 올려다보니 풀을 뽑던 집주인이 눈인사를 한다. 오이, 고추, 상추, 토마토 등이 올망졸망 심어져 있는 걸로 봐서 주인이 부지런한 모양이다. “이사오던 지난해 비가 엄청 와서 잔디도 떠내려가고 무서워 잠도 못잤어요. 그때 몸무게가 12㎏이나 빠졌어요. 업자를 잘 못 만나서 물빠짐 공사도 안돼 다시 파헤치고 마당 시멘트 공사도 두 번이나 다시 했다니까요.” 김천서 살다 귀촌했다는 김영민씨(56)가 시원한 박카스를 건네며 그간의 고생담을 들려줬다. “처음엔 많이 울었어요. 퇴직금 다 쏟아붓고 올인했는데. 지금은 좀 편해졌어요. 남편은 시골 생활이 별로라고 김천서 살아요. 집앞 경치가 기가 막히죠?” 뜰에 심은 블루베리, 방울토마토도 먹어보라며 한웅큼 따준다. 자연의 햇빛과 바람을 맞고 자라서인지 새콤달콤하고 싱싱해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가 안됐다.
해가 머리위로 올라오면서 배낭을 멘 등과 겨드랑이가 땀이 배 축축해진다. 그래도 바람이 시원해서 걸을 만하다. 이따금 육포가 된 뱀의 사체가 눈에 띈다. 으악! 방금 차에 깔린 듯한 다람쥐도 있다. 나뭇가지로 풀섶에 옮겨 놓았다. 죽음은 도처에 존재한다. 죽음이 거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삶이란 것을 깨닫는다. 이 길을 걷는 오늘의 여정도 삶과 죽음의 한 조각 아니겠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밥이 먹고 싶어 둘러봐도 밥집이 안보인다. 만만한 슈퍼도 없다. 그 점이 맘에 들기도 하지만.
매점휴게소가 하나 보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왁자지껄 사람들이 한창 숟갈질에 바쁘다. 구수한 청국장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사람좋아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숟가락 하나 더 놓을 테니까 우리랑 같이 먹자”고 권한다. 밥과 함께 청국장을 뚝 떠서 볼이 미어터져라 먹자 주인아주머니가 한마디 한다. “아이고, 밥도 참 소담하게 잘 먹네. 같이 이렇게 둘러앉아 먹으니까 얼마나 좋아.” 미역냉채, 열무겉절이도 입에 짝짝 붙는다. 도라지식혜까지 얻어먹고 밥값을 치르려 하자 다들 펄쩍 뛰며 손사레친다. 나도 그럴수 없다며 대신 새우깡 한봉지 사들고 찡한 마음으로 작별을 고했다.
구름이 짙어지는 것이 곧 비를 뿌리려나보다. 밭에선 농부들이 감자를 캐느라 여념이 없고 풀섶엔 산딸기가 지천이다. 3시가 훌쩍 넘어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우당탕탕 대형트럭이 휙 지나가다 세우더니 수염이 거칠거칠한 얼굴을 불쑥 내민 운전사가 “태워줘요?”를 연발한다. 문득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생각나 웃음이 픽 나왔다. 두 여자 앞에서 오두방정 촐싹대며 이상한 짓거리로 희롱하다 한 방에 날아간 트레일러 운전사 말이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걷는 데 불편했다. 아침 9시부터 안내면 독락당까지 9시간 걸었으니까 지칠 법도 하다. 걷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여행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루소가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의 방랑벽은 기차나 자동차를 타는 것으로는 달래지지 않는다. 머물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걷는 동안 난 구도자가 되고 선지자이기도 하다. 길은 그렇게 나를 이끈다.
▲가는길=대전에서 607번 시내버스로 옥천까지 가서 군내버스로 금암리행을 탄다.
▲먹거리=식당은 금강휴게소와 중간에 여울목매점휴게소가 있다. 도시락을 싸가는 것도 좋을 듯.
글·사진=우난순 기자 woo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