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체크카드였다. 대전역에서 카드를 집에 놓고 온 사실을 알았지만 약간의 현금이 있어 그걸로 표를 끊고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어떡하지?'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삶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철학적 명제 앞에서 고민은 시작됐다. 주위사람들한테 울릉도 간다고 큰소리 친 터라, 오기가 생겨 주사위는 던졌지만 막막했다. 늦은 밤 신경주역에 내린 후 경주가는 셔틀버스도 놓치고,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포항가는 택시를 탔다.
깜깜한 허허벌판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불안함에 쉴새없이 지껄였다. 포항 도착 후, 터미널 근처 파출소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여행경비를 빌려달라고 했다. 규정상 안된다길래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날 터미널로 갔다. 답답한 마음에 근처 포장마차 아주머니에게 자초지종 얘기했더니 혹시 모르니까 은행 가서 물어보라 한다. 과연, 5분도 안돼 체크카드가 내 손에 쥐여졌다. 우와! 신은 날 버리지 않는구나.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 했지만 '여행은 경험의 산파' 아닐까.
다음날 후포에서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울릉도로 향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단체로 왔다며 삶은 계란이며 쥐포, 새우깡을 자꾸 줬다. 선실 한 쪽에선 화장을 요란하게 한 뚱뚱한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흥에 겨워 블루스를 춘다. 3시간 후에 도착한 울릉도는 바다위에 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울뚝불뚝 치솟은 암벽, 달달한 바람, 티없이 맑은 공기.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타고 배타고 계속 앉아 있어서인지 발바닥이 근질근질했다. 저동항에서 묵기로 하고 내수전전망대로 향했다. 그런데 콘트리트 길이라 걷는 게 만만치 않다. 저동에 돌아왔을 땐 배도 고프고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 3명이 제육볶음을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합밥을 시킨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식탁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우리 사장 정말 몬됐다. 우리가 식모냐? 온갖 허드렛일 다 시키고. 계속 그러면 내는 더 이상 몬 참아.” “언니 말이 맞다. 차만 배달하믄 되지 와 우리를 거지발싸개 취급하노?” 다방 아가씨들이 사장을 성토하는 중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진 풍파 겪지 않으면 좋으련만, 내맘대로 안 되는게 세상사 아닌가. 한 아가씨는 요란하게 조는 내가 재밌는 지 힐끔힐끔 쳐다본다. 모텔로 돌아와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참 가관이다. 머리는 봉두난발인데다 얼굴은 열병 앓는 사람마냥 벌개져 있는 것이. 모텔 주인아줌마가 준 아기머리통만한 참외를 깎아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다.
다음날 아침 6시에 눈을 떴을 땐 몸이 가뿐했다. 이것이 노동과 유희의 차이다. 즐기기 위해 쓴 몸은 후유증이 없는 법. 주인아줌마한테 이장희에 대해 물었다. “에이, 지금 여기 없어. 미국 갔다는데? 울릉도엔 가끔 와.” 울릉도의 해안도로는 어딜 봐도 그림 같은 풍경이다. 코발트빛 바다와 날카롭게 치솟은 암벽, 울창한 숲은 환장하게 아름다웠다.
걷고 걸어 고개에 올라 마주한 나리분지는 그야말로 별세계였다. 시간도, 날아가던 새도, 바람도, 파도소리도 다 멈춘 듯 했다. 오직 포플러나무 잎들만이 햇빛에 반짝일 뿐. 너무 고요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성인봉 가는 등산로는 아름드리 나무와 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 집채만한 공룡이 나타날 듯 했다. 산나물도 지천이고 해발 984m의 성인봉에선 숲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25년전 울릉도에 들어와 한달 만 있다 나가자고 한것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안해 본 일이 없소. 오징어잡이배도 탔고 멀리 서해바다 조기배도 타봤고. 정말 원없이 자유롭게 살았지요.” 하산길을 같이 걸으며 그는 자신의 신산한, 유랑의 삶을 끝없이 풀어놨다. “젊을 적엔 자유로운 생활이 좋았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혼자사는 게 외롭디다.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뭍에 갈일도 없네요.” 도동에서 밥한끼 먹는 중에도 남자는 연신 얘기들어줘서 고맙다고,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바람따라 물결따라 부초처럼 떠도는 인생은 누군가에겐 분명 매력적이다. 허나 거기엔 망망대해 검푸른 파도에 맞서는 순결한 긍지가 있어야 한다. 차를 나르는 앳된 처녀도, 노쇠한 뱃사람도, 그들은 안다. 떠도는 섬 울릉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글=우난순 기자 woo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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