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삶은 파도의 연속인 걸…내 경험의 산파, 울릉도

  • 문화
  • 여행/축제

[주말여행]삶은 파도의 연속인 걸…내 경험의 산파, 울릉도

검푸른 파도를 헤치고 보니 섬은 바다 위에 뜬 산과 같고 숲은 환장하게 아름다웠다… 모두가 풍파를 만나 알았을 테다, 인생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 승인 2015-06-11 13:22
  • 신문게재 2015-06-12 14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주말여행]내 경험의 산파, 울릉도

4년전 꼭 이맘 때, 나의 울릉도 여행은 시작부터 엄청 꼬였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대형사고' 앞에서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최악의 '에피소드'를 처절히 겪은 후 울릉도와의 랑데부는,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했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2011년 6월의 울릉도 여행,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의 발단은 체크카드였다. 대전역에서 카드를 집에 놓고 온 사실을 알았지만 약간의 현금이 있어 그걸로 표를 끊고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어떡하지?'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삶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철학적 명제 앞에서 고민은 시작됐다. 주위사람들한테 울릉도 간다고 큰소리 친 터라, 오기가 생겨 주사위는 던졌지만 막막했다. 늦은 밤 신경주역에 내린 후 경주가는 셔틀버스도 놓치고,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포항가는 택시를 탔다.

깜깜한 허허벌판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불안함에 쉴새없이 지껄였다. 포항 도착 후, 터미널 근처 파출소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여행경비를 빌려달라고 했다. 규정상 안된다길래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날 터미널로 갔다. 답답한 마음에 근처 포장마차 아주머니에게 자초지종 얘기했더니 혹시 모르니까 은행 가서 물어보라 한다. 과연, 5분도 안돼 체크카드가 내 손에 쥐여졌다. 우와! 신은 날 버리지 않는구나.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 했지만 '여행은 경험의 산파' 아닐까.

다음날 후포에서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울릉도로 향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단체로 왔다며 삶은 계란이며 쥐포, 새우깡을 자꾸 줬다. 선실 한 쪽에선 화장을 요란하게 한 뚱뚱한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흥에 겨워 블루스를 춘다. 3시간 후에 도착한 울릉도는 바다위에 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울뚝불뚝 치솟은 암벽, 달달한 바람, 티없이 맑은 공기.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타고 배타고 계속 앉아 있어서인지 발바닥이 근질근질했다. 저동항에서 묵기로 하고 내수전전망대로 향했다. 그런데 콘트리트 길이라 걷는 게 만만치 않다. 저동에 돌아왔을 땐 배도 고프고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 3명이 제육볶음을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합밥을 시킨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식탁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우리 사장 정말 몬됐다. 우리가 식모냐? 온갖 허드렛일 다 시키고. 계속 그러면 내는 더 이상 몬 참아.” “언니 말이 맞다. 차만 배달하믄 되지 와 우리를 거지발싸개 취급하노?” 다방 아가씨들이 사장을 성토하는 중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진 풍파 겪지 않으면 좋으련만, 내맘대로 안 되는게 세상사 아닌가. 한 아가씨는 요란하게 조는 내가 재밌는 지 힐끔힐끔 쳐다본다. 모텔로 돌아와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참 가관이다. 머리는 봉두난발인데다 얼굴은 열병 앓는 사람마냥 벌개져 있는 것이. 모텔 주인아줌마가 준 아기머리통만한 참외를 깎아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다.

다음날 아침 6시에 눈을 떴을 땐 몸이 가뿐했다. 이것이 노동과 유희의 차이다. 즐기기 위해 쓴 몸은 후유증이 없는 법. 주인아줌마한테 이장희에 대해 물었다. “에이, 지금 여기 없어. 미국 갔다는데? 울릉도엔 가끔 와.” 울릉도의 해안도로는 어딜 봐도 그림 같은 풍경이다. 코발트빛 바다와 날카롭게 치솟은 암벽, 울창한 숲은 환장하게 아름다웠다.

걷고 걸어 고개에 올라 마주한 나리분지는 그야말로 별세계였다. 시간도, 날아가던 새도, 바람도, 파도소리도 다 멈춘 듯 했다. 오직 포플러나무 잎들만이 햇빛에 반짝일 뿐. 너무 고요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성인봉 가는 등산로는 아름드리 나무와 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 집채만한 공룡이 나타날 듯 했다. 산나물도 지천이고 해발 984m의 성인봉에선 숲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25년전 울릉도에 들어와 한달 만 있다 나가자고 한것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안해 본 일이 없소. 오징어잡이배도 탔고 멀리 서해바다 조기배도 타봤고. 정말 원없이 자유롭게 살았지요.” 하산길을 같이 걸으며 그는 자신의 신산한, 유랑의 삶을 끝없이 풀어놨다. “젊을 적엔 자유로운 생활이 좋았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혼자사는 게 외롭디다.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뭍에 갈일도 없네요.” 도동에서 밥한끼 먹는 중에도 남자는 연신 얘기들어줘서 고맙다고,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바람따라 물결따라 부초처럼 떠도는 인생은 누군가에겐 분명 매력적이다. 허나 거기엔 망망대해 검푸른 파도에 맞서는 순결한 긍지가 있어야 한다. 차를 나르는 앳된 처녀도, 노쇠한 뱃사람도, 그들은 안다. 떠도는 섬 울릉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글=우난순 기자 woo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2.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3. [현장취재]한남대 재경동문회 송년의밤
  4.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5.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1. 대전시주민자치회와 제천시 주민자치위원장협의회 자매결연 업무협약식
  2.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대전.충남 통합으로 세계 도약을"
  3.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4.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5. 천안시의회 김영한 의원, '천안시 국가유공자 등 우선주차구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상임위 통과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