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삽화는 실제 민제인 선생과 관련 없습니다. |
▲동몽선습의 저자로 새롭게 조명=일종의 아동 교양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쓰여진 최초의 아동 교양 교과서로 서양 최초의 교과서인 체코슬로바키아 코메니우스의 '세계도회'보다 1세기이상 빠른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돼 왔다. 한때 모재 김안국의 저술이란 설이 있었으나 이후 송시열이 발문을 쓴 박세무의 '동몽선습'이 정본이자 원본으로 통용돼 왔다.
하지만 서지학자 안춘근씨가 입암 민제인이 저술한 또 한편의 목판본 '동몽선습'을 발견, 박세무의 필사본보다 기록연대가 앞선 최고본이자 민제인이 원작자라고 주장한 후 지금은 민제인 선생을 저술자로 혹은 민제인 선생과 박세무 선생을 공동 저술자로 보고 있다.
안춘근씨는 지난 1981년 6월 입암 민제인이 짓고 타괴 윤인서의 발문이 찍힌 목판본을 입수한 후 2년 뒤인 1983년 한국출판판매 주최 세계교과서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이를 최고본(最古本)이라고 일반에 공개했던 바 있다.
당시 그는 “당초 책의 끝머리에 박세무의 호인 소요당이라고 적힌 필사본 '동몽선습'이 최고본이자 정본으로 알고 있었으나 책의 됨됨이가 오래된 것 같질 않고, 책의 마지막 부분인 고려 우왕에 대한 기록 역시 민제인이 쓴 이후 박세무 때에 와서 내용이 변경된 것을 발견해 민제인본이 최고본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밝혀 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학계는 윤인서의 발문이 붙은 입암 민제인이 지은 '동몽선습'의 발문 끝부분에 '가정 계묘(嘉靖 癸卯)'라는 목판본의 간행연도가 적혀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가정계묘는 서기로 1543년으로 이에 따라 민제인 선생이 '동몽선습'의 원작자이며 현재로서는 민제인이 쓴 책을 최고본(最古本)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경과 사로 구성='동몽선습'의 전체적 구성 체계는 크게 유학적 이론도덕을 담고 있는 '경(經)'과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해 놓은 '사(史)'에 해당하는 부문으로 나눠져 있다. 경부(經部)에는 다시 총서와 본문과 총론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본문은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 등 오륜으로 이뤄져 있다. 사부(史部)에는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학계에서는 '동몽선습'만큼 교과서로서의 구실을 하며 짜임새 있게 내용을 간추려 놓은 것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은 일반가정의 한문 초학자를 위한 기본적인 교재로 애용된 것은 물론 왕세자의 교육에도 사용되기도 했다.
민제인 선생은 '동몽선습'의 편찬 동기를 “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부모들이 자녀 교육이 말단적인 훈계와 문장 익기에만 치우치고 근본적인 교육은 경시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해다.
민제인 선생은 이어 “세상의 참된 교육을 유지하고 독행(篤行)과 진학(進學)의 문로(門路)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를 간행했다”고 밝혔다. 교권붕괴나 학교 폭력, 패륜 범죄 등 오늘날 인륜을 저버리는 범죄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몽선습'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기도 하다.
▲대전출신의 유학자, 새롭게 조명 받다=조선 중기 문신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올랐던 민제인 선생은 성균관 전적을 지낸 민구손 선생과 사후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언양김씨 사이에서 149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후덕한데다 위엄까지 겸비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군자의 덕목인 수기 안인(修己 安人)을 실천한 지성인의 표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경서와 역사에 밝고 문장에 능통해 시문집으로 알려진 '입암집' 6권 3책과 오륜과 역사로 구성된'동몽선습(童蒙先習)'이 있으며, '동국사략' 3권도 저술했다.
29일 열리는 '동몽선습의 저자 입암 민제인(立巖 閔齊仁)과 그 후예들'이라는 학술대회에서는 대전지역사와 중앙 정치사연구에 주목되는 인물들인 민제인 선생과 함께 3세7효, 그리고 노봉 민정중과 둔촌 민유중의 사상도 함께 다뤄질 예정이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6세기 중엽에 현재의 유성구 도룡동인 경운에 터를 잡았던 민여검의 직계 자손들은 5세에 걸쳐서 세상이 기리는 돈독한 충효를 실천해 '오세충효록'을 남기고 있으며, 민여검 이후의 3세 동안에 연이어 배출된 효자들로 인해 여흥민씨 3세7효라는 호칭을 얻고 있다.
오희룡 기자 huily@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