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고창의 봄… 보리도 사람도 무르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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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고창의 봄… 보리도 사람도 무르익어갑니다

냇가서 낚시하던 사람들은 진한 김치찌개 국물을 권했고… 여행은, 가는 곳마다 그저 좋은 사람들 뿐이었다

  • 승인 2015-05-07 18:50
  • 신문게재 2015-05-08 14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주말여행]고창 청보리밭과 읍성

안개 자욱한 드넓은 김제평야가 바다 같았다. 이른 새벽인데도 농부들은 들판에 나와 밭갈이 할 채비를 하고 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검붉은 땅이 기름져 보였다. 장끼 한 마리가 먹이를 찾는지 논둑을 서성인다. 계절에 따라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행위야말로 가장 단순하고 숭고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 아닐까.

이삭이 다 팬 고창 청보리밭은 산들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구릉지대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통통하게 여문 보리알들이 만지면 터질것만 같다. 이상하게 보리에 대한 추억은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문득 어릴적 철없던 행동이 떠오른다. 한여름 점심시간에 친구 인숙이가 도시락을 뚜껑으로 가리고 먹고 있었다. 난 궁금해서 뚜껑을 열어젖히려 하고 인숙이는 가리려고 애썼다. 결국 뚜껑이 열린 도시락은 꽁보리밥과 고추장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친구의 치부를 내가 까발리고 만 것이다.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뺨에 주근깨 몇 개가 돋아 있었던 순하디 순한 인숙이.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공부를 꽤 잘했는데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산업체학교에 갔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핍의 상징이었던 보리가 이젠 볼거리가 되어 여행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일이 근로자의 날인데다 청보리축제와 겹쳐 '메인 무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냐'를 중얼거리며 대충 둘러보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고즈넉한 보리밭의 정취는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고인돌 유적지에 와서야 숨통이 트였다. 경사진 산비탈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고인돌이 몇천년전의 인류가 조성했다는데, 저 큰 바윗덩이를 어떻게 옮겼을까 궁금해진다. 이끼 낀 고인돌을 만지며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봤지만 막막했다.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유적지의 쓸쓸함을 더할 뿐.

산아래 유채꽃밭 사잇길을 걷다 황소개구리 울음소리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리를 건너는데 냇가에서 낚시질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아저씨들! 고기 잡으셨어요?” “고기는 아적 못잡고 커피 마실라고 물 끓이고 있소. 여그 내려와서 한잔 하소.” 버너 위 스뎅 대접의 물이 끓고 있었다. 동네 친구들로 종종 낚시하면서 밥도 해먹고 우의를 다진단다. 청보리밭에 갔다 왔다고 하자 다들 웃었다. “아따, 거 보리밭 뭐 볼게 있다고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겄네. 여그 사람들은 한번도 안가요.” 먹다남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밥 한공기 건네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숭덩숭덩 썬 돼지고기와 두부가 다 으깨질 정도로 오래 끓인 김치찌개의 진한 국물이 식욕을 자극했다. 얼큰한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사이 한 아저씨가 전임 군수의 전횡과 청보리밭 축제와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여행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어딜 가나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을 알게 되는 일이다. 가는 곳마다 그저 좋은 사람들뿐이다.

커피까지 얻어마시고 배 부른건 좋았으나 읍내 갈일이 난감했다. 고창읍성을 보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버스가 자주 없었다. 걸어 가다가 버스가 오면 타기로 했다. 잠깐 걷다 길 옆에 승용차가 서 있길래 봤더니 할아버지는 운전석에 있고 할머니는 밭에서 나물을 뜯고 있었다. 읍내로 가시면 태워주실 수 있냐고 했더니 선뜻 그러마했다. 냉큼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할머니가 와서 “기다렸다 버스타면 되지 왜 태워달라고 하냐”며 앙칼지게 역정을 냈다. 할머니가 차에 안타길래 묻자 집이 여기라고 했다. 의문은 곧 풀렸다.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허허, 애인이라 저렇게 질투하는 겨.” 옴마! 애인이라고? “마누라는 몰러. 그냥 알고 지낸다는 것밖에.” 비밀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차안에 농기구도 있고 흙도 많이 묻어 있어 영락없는 농부할아버진데, 열정적이고 재미나게 사는 분이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할아버지, 애인한테 '차 태워준 여자가 나 꼬시더라, 내 전화번호도 땄다'고 뻥쳐보세요”했더니 “그럼 난리나지. 폭발할 겨”라고 대꾸한다. 할아버지와 난 공모자가 돼 죽이 척척 맞아 얘기꽃을 피웠다.

고창읍성이야말로 읍내 사람들이 아끼고 즐겨찾는 휴식처다. 1453년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한 읍성은 늙은 소나무들과 참나무, 잔디밭 등 정갈하고 멋들어진 정원 같았다. 오솔길도 많고 성곽길을 걸으며 맛보는 달콤한 바람과 고창읍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변엔 도서관도 있고 작은 영화관도 갖췄다. 읍성 아래 편의점 여주인은 젊은 날 대전에서 직장생활 했다며 대전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전이 때때로 그립단다. 덕분에, 아무한테나 안 판다는 '허니버터칩'도 샀다.

왜 여행지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답은 나에게 있었다. 내가 마음을 열면 타인도 마음을 연다는 걸 깨달았다. 난 여행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끝났는데 길은 시작됐다”고.

▲가는길=버스는 대전복합터미널~군산~고창, 기차는 서대전역~정읍까지고 버스로 고창까지 간다.

▲먹거리= 고창 3미 풍천장어, 복분자, 수박이 있다. 안타깝게도 하나도 못 먹어봤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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