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간이역의 미소, 영동 심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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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간이역의 미소, 영동 심천역

2006년 근대문화유산 지정된 역…수수깡과 짚으로 벽 채운 온기에 情 묻어나

  • 승인 2015-02-12 13:20
  • 신문게재 2015-02-13 14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모처럼만에 햇살이 따사로웠다.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 가슴이 벌렁벌렁해진다. 더구나 보물같은 휴일이니 가만 있을 수 없다. 대충 떡, 귤 등 간식거리를 가방에 챙겨 넣고 대전역으로 달려갔다. 오전 11시 58분 무궁화호 열차에 오르자 웬 까까머리 군인들이 자리를 꽉 채웠다. 여드름 자국이 선명한 ‘소년들’이 조카를 보는 것 같아 귀엽기 그지 없다.

20여분이 지나자 영동 심천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기차는 서둘러 나를 부려놓고 저만치 달아난다. 내린 승객은 단 두명. 하늘을 보니 구름 한점 없다. 코발트빛 하늘 아래 덩드러니 자리잡은 심천역이 나를 반긴다. 같이 내렸던 짐보따리를 인 아주머니는 어느새 사라졌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살피다 대합실로 들어가 보니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모직 중절모에 두툼한 코트를 입은 차림새가 고흐의 ‘가셰 박사’를 떠올리게 했다. 병색이 짙은 노인은 기차를 타려는 지 곧 일어섰지만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염려스런 눈길을 보내자 대전 간다며 내게 손인사를 한다. 마침 역무원이 노인을 부축해 기차 타는 데까지 바래다 드렸다. 간이역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불현듯 옛 생각이 난다. 새벽기차 타고 광주에서 내려 역 대합실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겨울이라 제법 추워 몸을 움츠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역무원은 흔히 있는 일인 듯 남자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한참 후에 남자는 진정이 됐는지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헝클어진 머리에 옷차림이 남루한 것으로 봐서 노숙자인 듯 했다. 가족은 있는지, 밥은 먹는지, 지병이 있는 것 같은데.... 삶이 제각각인 건 알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엔 조물주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지곤 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춰서인지 심천역은 간이역이 주는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심천역은 몇 번 철거하려 했으나, 건물원형이 잘 보존돼 2006년 근대문화재로 지정됐다. 마침 점심을 먹고 있던 역무원들이 내게 커피를 건네며 이것저것 얘기해줬다. 건물이 앙증맞다고 했더니 건물 내벽에 단열재로 수수깡과 짚을 넣어 따뜻하단다. 손수 끓인 김치찌개가 맛있어 보인다며 내가 스스럼없이 손으로 고추부각을 집어먹자 한 역무원이 “우리랑 같은 직원같다”며 껄껄 웃는다. 그러면서 “밥은 없고 라면 끓여줄테니 먹고 가라”며 자리를 권한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아 신김치에 라면 국물까지 다 먹자, 혼자 무슨재미로 여행하냐며 신기한 듯 한마디씩 건넨다.

면소재지인데도 마을이 너무 한적했다. 눈부신 햇살만이 내리쬘 뿐 오가는 사람 하나 없다. 건물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양지와 음지의 선명한 대비가 데 키리코의 ‘우울하고 신비한 거리’처럼 거리가 텅 비었다. 유령도시에라도 온 걸까. 권태에 빠진 햇살 날카로운 콘크리트 바닥을 거닐며 내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는 타타르인 같다고 생각했다. 길 가 회전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할아버지를 만났다. 서로 반가워 금세 친해진다. 뒤에 있는 가게 주인이시냐고 물으니까 담배도 팔고 시계도 판다며 담뱃값이 올라 담배가 안팔려 재미가 없단다. “내가 6.25때 미군이 담배를 주길래 피웠더니 구수해서 계속 피워. 65년 됐어. 밥은 굶어도 담배는 못끊지 뭐.”, “담배 잎에서 치매약을 추출해서 담배 피우면 치매도 안 걸린다대.” 대전서 가까운데도 공기가 참 맑다고 하니까 “사람이 벨루 없으니께. 젊은이들은 다 대전으로 나가고 노인들만 살어. 올해 초등핵교 입학생이 1명이면 말 다했지”라며 씁쓸해한다.

얼핏 보면 심심한 마을이지만 골목골목 헤매고 다니는 게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문 닫은 다방, 양조장, 들기름 냄새 폴폴 나는 오래된 방앗간... 이방인에겐 그저 쇠락해가는 궁상맞은 동네로 비춰지겠지만 어디나 그렇듯 사람 사는 곳은 매 한가지다. 친절한 역무원들, 담배가게 할아버지, 경치좋은 곳을 소개한다며 마을 뒷산으로 이끌었던 입담좋은 어르신. 하루가 전쟁처럼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신물나서 도망치듯 도시를 빠져나오곤 한다. 허나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위로와 어머니같은 미소가 내게 용기를 준다. 바로 그들이, 사람이 결국 내 정신의 인연들이자 내 감성의 친구라는 걸 알게 된다.

가는 길: 열차는 무궁화호로 대전역에서 하루 5번 운행한다. 첫차는 오전 11시 58분이고 막차는 오후 8시 9분이다. 승용차로는 40분 걸린다.

먹거리: 워낙 마을이 작아서 식당이 두세곳 밖에 없다. 도시락을 싸가서 먹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우난순 기자 woo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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