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흔하디 흔한 쌀. 밥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하얀 쌀밥을 먹는 건 특별한 날 뿐이었다. 생일날 엄마가 지어주시는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눈부시게 흰 쌀밥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엄마는 내게 생일이라고 특별히 따로 조그마한 밥상을 차려주셨다. 쌀밥과 집간장으로 간한 말간 미역국에 계란찜과 들기름을 발라 아궁이 불에 구운 김이 전부였다. 하지만 진수성찬이 따로 없는 밥상이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따뜻할 때 먹는 밥의 성질을 닮아서인지 한국인들은 끈끈한 성미를 가졌다. 그래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쌀 농업이 심상치 않다. 한국은 내년부터 쌀 시장이 전면 개방된다. 정부는 더 이상의 개방 유예는 불가피하다며 513%라는 높은 관세율을 반드시 지켜 우리 농업과 농민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농민들은 “정부가 식량주권을 포기했다”며 벼가 익어가는 논을 갈아엎으며 성난 민심을 드러냈다.
일각에서도 513%를 방어하기 위해선 다른 무언가를 내줘야 하는데 과연 정부가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문을 손해보겠냐는 것이다. 언젠가 모 전경련 회장의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논밭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반도체공장이나 상업휴양시설을 지어 돈을 벌면 된다. 쌀은 거기서 번 돈으로 수입해 사다 먹으면 된다.” 결국 513%라는 관세율은 쌀 수입을 원천적으로 막는 항구적인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우려가 현실화되면 농민들은 쌀 농사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바나나, 포도, 키위, 오렌지, 소고기 등 알고 보면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농축산물은 수입산으로 채워졌다. 이제는 쌀까지? 이 모든 것들은 자유무역을 표방한 세계화의 일환으로 행해진다. 세계화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구조적 조건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발전전략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는 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를 담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유주의 세계화는 미국의 주도 하에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왜곡된 세계화”라고 비판했다. 중요한 건 세계화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농산물 시장 개방의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는 얘기다.
진짜 문제는 국민들의 쌀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우리의 역사는 벼농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쌀은 한민족의 피와 살이고 정신이다. 또한 쌀은 다른 작물보다 다양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밥'만 제대로 먹을 수만 있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집 있고 쌀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식탁은 이제 피자, 스파게티, 햄버거, 라면 등 밀가루로 된 음식이 점령한지 오래됐다. 아침은 빵으로, 점심은 칼국수 내지는 피자, 저녁은 밥 정도. 그리고 야참은 라면으로 마무리할 것이다. 쌀밥은 고작해야 한끼 정도일 테다. '쌀은 주권이요, 생명'이라는 말처럼 이제라도 정부와 국민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 주식인 쌀을 식탁에서 밀어낼 수 없다. 밥은 우리의 문화이자 역사고 정체성이다.
부산은 내게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늘 그리워하고 사는 게 지루하면 훌쩍 밤기차를 탄다. 부산은 이국적인 항구도시가 주는 생경함과 미로 같은 도시 골목을 헤매는 이방인의 노스텔지어가 배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를 부산으로 이끄는 것은 따로 있다. 나에게 부산은 곧 돼지국밥이다. 삶은 돼지고기와 부추를 듬뿍 넣은 칼칼하고 담백한 국물에 고슬고슬한 밥 한 공기를 탁 넣어 말아 먹는 맛이란! 밥은 유전자에 각인된 학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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