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 속의 일본어 잔재

  • 오피니언
  • 사외칼럼

[기고]한국 속의 일본어 잔재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 승인 2014-10-28 13:59
  • 신문게재 2014-10-29 16면
  •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한반도에서 쭉 자라온 한국 토박이들에게 이웃나라 일본은 경쟁의 대상이자 영원한 숙적(宿敵)으로 인식되어 왔다. 아무것도 몰랐을 천진난만한 유치원 시절부터 우리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선조들이 겪어야만 했던 갖가지 고문들과 일본군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만행의 역사로 인해 우리의 가슴 한 편에는 '일본 알레르기' 같은 거부감이 형성되어 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여서, 초등학교 시절 삼일절이나 광복절 때의 그림대회에서는 태극기를 갖고 일제에 항거하는 평범한 조선인이나 또는 피를 흘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열사들을 그렸던 기억이 생생하다(나는 이 그림으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18세기 말 일본을 여행한 서유소(徐有素)의 연행잡록(燕行雜錄)에 보면 “일본인의 성정은 매우 조급하고 경박하며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면 뱁새처럼 굴고… 도량이 넓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을 마치 속 좁은 밴댕이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는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비하(卑下)해 왔다. 한국과 일본의 운동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국민이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을 하기도 한다. 한일전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학교든 직장이든 다들 결과에 대한 소식을 궁금해 한다. 보통 한국이 이기면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만 같은 벅찬 감동이 밀려오지만, 행여나 지는 날이면 괜히 침울해지고 다시 반일감정이 싹 터 오른다.

하지만 우리는 반일감정만 갖고 있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선진국 일본에 대한 동경(憧憬)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일제 샤프나 소형카세트플레이어인 워크맨을 갖고 있는 친구를 보면 부러워했고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학생들이야 필기구 정도였겠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소니와 내셔널 사(社) 전자제품을 자기 집 가장 좋은 거실에 모셔 놓고는 손님들에게 자랑을 일삼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생활속에서 일본어는 또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구리(concrete, 양회반죽), 바케쓰(bucket, 들통), 밤바(bumper, 완충기), 화이바(fiber, 안전모) 등 건축업계에서 쓰이는 일본어가 있는가 하면, 닭도리탕(-鳥(とり)湯, 닭볶음탕), 모치떡(餠(もち), 찹쌀떡), 비까번쩍하다(ぴか, 번쩍번쩍하다), 뽀록나다(褸(ぼろ), 드러나다), 왔다리 갔다리(-たり -たり, 왔다 갔다) 등 일본어 단어가 순 우리말이나 한자어와 함께 뒤섞여 쓰이는 경우도 있다. 일본식 영어는 또 어떤가? 도란스(transformer, 변압기), 레지(register, 다방 종업원), 오바(overcoat, 외투), 백미라(back mirror, 뒷거울), 올드미스(old miss, 노처녀), 워카(walker, 군화) 등이 그렇고, 그 외 하다 못해 당구용어 등은 상당수가 지금도 일본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아까다마(빨간공), 오마와시(크게 돌리기), 쿠션(벽), 히네루(회전), 가라쿠(벽돌리기), 갸꾸(반대치기), 겐세이(견제), 기리까시(비껴치기), 나미(얇게치기), 다마(공), 다이(당구대), 맛세이(찍어치기) 등이 그렇다.

우리나라는 광복 직후부터 '국어 정화'라 하여 대대적으로 일본어 잔재를 우리말로 순화해 왔다. 당시의 언어순화가 주로 우리말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면서 지금까지의 일본어 순화는 상당한 실효를 거둘 수 있었고, TV 방송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 즉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아직도 많은 일본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런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2.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3.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4.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5.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1.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2.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3. [현장취재]한남대 재경동문회 송년의밤
  4. 대전시주민자치회와 제천시 주민자치위원장협의회 자매결연 업무협약식
  5.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대전.충남 통합으로 세계 도약을"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