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고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선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도리, 즉 도덕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위정자들의 국민들을 향한 정치의 근본이라고 했던 것이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군자의 의미, 그리고 우리 전통사상으로서의 선비정신은 바로 덕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정치의 근본이라는 뜻이 아니었던가?
오늘날의 정치는 최후의 선조차 무시하고 법위에서 법을 악용하고 이를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패도정치를 넘어선 정치라는 이름의 악한 행위가 아닌가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공자님은 인(仁)을 인간 도리의 근원으로 보았는데 바로 인이란 충서(忠恕), 곧 오로지 한 마음으로 자신의 중심을 잡고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남을 자신과 똑같이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 안연이 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극기복례(克己禮),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禮)란 무엇일까? 원래 공자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바로 백성을 평안하게 하려는데 있다고 하였는데(修己以安百姓) 여기에서의 백성은 다른 사람, 즉 모든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처럼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수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또한 예란 바로 의(義)가 구체화된 형식으로서 오늘날의 법과 정치 그리고 도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회질서에 관련한 모든 것을 예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예의(禮儀)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예의가 없다는 말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예절과 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예의의 기준을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꾸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의가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러한 예의가 없다면 그리고 오로지 법에 의한 삭막한 형식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예의라는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참 예의가 바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저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남의 행동이나 생각을 허용하고 있을 뿐 실제로 그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존중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법과 질서라는 말보다는 예의, 존중이라는 말이 넘칠 때에 조금은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덕치의 근본인 것이다.
법무법인 저스티스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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