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 셈치자.)
Let us suppose that we lost it.
(잃어버린 셈치자.)
천안삼거리, 신정네거리, 논산오거리 등으로 거리까지 분간하니 숫자 관념이 무디지 않다고 한다. 주당들이 '꽃가지 꺾어 잔 수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라고 읊었다며 수학적 사고의 근거로 들이대기도 한다. 3·1. 4·19, 5·16, 6·25, 8·15를 보면 한국인처럼 숫자 좋아하는 인류가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일상의 숫자와 셈에는 두루뭉수리로 '셈치고' 만다. 위의 예시문도 우리 식으로 번역하니까 '셈치자'가 된다. 숫자를 말할 때는 딱 떨어지지 않게 두서너, 예닐곱 등으로 어림친다. 법보다 사람을 믿었고 셈을 따지면 양반이 아니라는 의식이 저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이다. 정경부(정치경제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의 첫 편집국장(안영진)께서 지팡이에 몸을 의탁하고 찾아와 짜장면을 대접했다. 그분이 화신관 짜장면을 기억 속에서 '리콜'하는 동안, 나는 그분이 “짜장면 네댓 그릇” 등 대충의 숫자로 말해 다시 세곤 했던 일이 반추됐다. '몇몇(several)' 정도로 알아듣고 정성들여 먹을 입을 헤아려야 했었다.
정도 차이이지 우리 아버지들, 삼촌들 세대까지 대충 그랬다. 영어에 어림수 비슷하게 예닐곱(half of dozen), 한 20~21개(a score) 같은 '라운드 넘버'가 있지만, 동네마다 되가 다르고 집집마자 자가 다른 우리에 대적하기엔 세상 어느 말도 약과다. 말하면서도 '모르긴 해도, 잘은 모르지만'이라며 골안개, 물안개 자욱한 안개 전치사를 흘리는 버릇이 있다.
드물게는 물론 장삿셈의 달인급도 있었다. 회계에 밸런스, 좌우 대조 균형을 도입한 개성상인의 사개치부법은 서양 복식부기 원조인 이탈리아 상인들 것보다 앞서 나왔다. 고구려에서 물려준 고마샤쿠(고려척·高麗尺)로 일본은 지진에 강한 주택을 지었지만 이 본고장은 암행어사 출두하면서 형구 통일과 세금 균등 징수를 위한 두 잣대인 유척을 갖고 다녔다. 회계학의 눈으로는 조선왕조 500년 체제의 붕괴 원인을 '아닌 게 아니라'(이것도 안개어!) 회계 부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이해타산적은 아니지만 계산할 때는 머리 우측 허공에 주판알이 대령한다. 그러한 맺고 끊는 수(數) 본능이 돌연 고장났나, 청소를 놀이인 셈치며 누추한 다락방을 공주님 침실로 바꾼 '셈치고 철학'의 빙의인가. 소공녀도 늑대가 창자를 할퀴는 듯한 배고픔만은 셈치고가 안 됐지만, 가을을 타는지 식욕이 달아나 그것도 마저 된다. 도둑맞은 셈치고, 도와준 셈치고, 버리는 셈치고, 속는 셈치고….
해명하는 셈치고 변명하면, '셈치고'는 나약한 체념이나 꽁지 바짝 내린 포기가 아니다. 좋은 상황 상상하며 기다리는 자기최면이다. 이 욕구가 좀 엉뚱하게 승화되고 있다. 집안 전시공간이 남아 악기를 낚싯줄로 매달았다. 유명 상표를 붙여 '프라다 변기'를 만든 톰 삭스, 세제 상자를 쌓아 팝 아트라 칭한 앤디 워홀의 특권을 빌렸다고 친다. 예술하는 셈치고 만든 전위적(?) 작품이니 예술인 셈치고 봐준다면 좋겠다.
최충식 논설실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