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논설실장 |
요즘 토끼와 거북의 '우화들'이 자주 생각난다. 선생님들은 겸손과 끈기의 승리라는 명작의 교훈을 주입시켰다. 해석하는 프리즘은 다양하다. “거북이를 토끼하고 게임 붙여준 것만도 어디에요?” 그럴 수 있다. “토끼는 달리기 선수이고 거북이는 수영 선수인데 불공정 게임 아닌가요? 원초적 불평등, 원천무효지요!” 생각 나름이겠다. 너그럽게 '낮잠 즐기는 여유와 깨우지 않는 이해심'에 박수 보내도 될 것 같다. 거북이는 느려도 늦지 않다는 성찰의 양념을 치면 그럴듯하겠다.
그러지 않고, 마리아 몬테소리가 각색한 교육학적인 방법도 쓸모 있어 보인다. 토끼는 땅에서, 거북이는 물에서 경주하는 것이다. 룰에 따라 거북이가 헤엄치다 보니 토끼가 다리를 다쳐 끙끙대고 있다. 거북은 토끼를 들쳐업고 헤엄쳐 목적지에 닿는다. 등수는 의미가 사라졌다.
도전정신, 그보다 욕망이 삶의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진짜 정글에서도 필요한 부분만 취한다. 영역 주도권 싸움, 서열 경쟁, 암놈 차지하기를 위해 맞짱 뜨지만 비정하게 사촌을 해칠 동기는 아니다. 다행히 인간세상에는 싸움이나 도망질 말고 '보살핌과 친교'가 있다. 따뜻한 참여의 시선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런데 거북이와 토끼 이상으로 현실은 출발점이 달라 '경제' 문제가 일어난다. 정의는 강자의 편이라는 기원전 5세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2014년 이 가을에도 통용된다. 21세기 초입까지 살다간 존 롤스는 격차 원리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인정했다. 희소하지만 우리에게도 지역균형선발 같은 소수자 우대 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이 있다. 정치권은 '격차 해소 특위'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역차별을 낳거나 다른 사회적 약자의 기회를 빼앗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빵을 독식하지 않는 사회라야 한다. 좀 짜지만 나눠먹는 인정머리가 좋다. 결승점에 못 가본 사람, 출발점에 서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긴 거북이, 낮잠 자는 토끼 모두 부러울지 모른다.
오늘 이야기 중 먼저 스치는 얼굴이 대전의 박재홍 시인이다. 계간 '문학마당' 발행인인 박 시인은 내가 도와주지 못했던 일을 씨앗 삼아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집필실'로 싹 틔워 장애인 작가의 출판을 돕는다며 빚진 마음으로 사는 내게 되레 고마워한다. 그는 지체장애 2급이다. 토끼와 거북, 어떤 해석이든 자유지만 이 순간만은 이런 질문이 듣고 싶다. “토끼가 거북이를 한 40~50m는 보내줘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토끼가 이겼으면 성립하지 않을 이야기들 아닌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