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현미 홈페이지 제공 |
-한 길을 꾸준히 걸어서 30년 기념 무대에 서는 느낌은 ?
저는 사실 덤덤해요. 왜냐하면 계속 노래를 쭉 불러왔고요. 다만 한번 흐뭇해하고 혼자 대견해하고 그러면서. 노래를 들어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노래를 했겠다 이런 생각에, 팬들에게 감사하는 그런 마음이 많이 들고 있어요.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30년. 30년 전에 서울 중구에서 약국 하셨잖아요. 그 약국 하시던 약사님이 어떻게 가수로 데뷔했나.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친정엄마가 약국을 차려주셨어요. 그게 동네 구석에 있다 보니까 운영이 잘 안 됐습니다.
-운영이 잘 안 됐어요?
네. 수익이 별로 없었죠. 그러다 보니까 제가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하루 종일 약국에 멍하니 앉아 있었겠어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썩 잘했다고 주위 가족 친지들한테 소문이 났어서 중학교 때 잠시 노래 트레이닝을 받고 기념 앨범 낸 게 있어요. 그때 저를 기억해 주신 작곡가 정종택 선생님이 약국으로 찾아와주셨죠.
-꼬맹이 때 노래 잘하던 그 아이를 찾아서 약국까지 왔나?
네, 정종택 선생님께서. '이제 노래 좀 해도 되지 않겠느냐? 데모테이프를 만들자' 그러면서 녹음실에 찾아갔는데, 우연하게 쌍쌍파티 음악들이 있었는데 사실 조미미 선배님이 그날 녹음하기로 했는데 안 오신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가 대신 불렀어요. 그런데 쌍쌍파티라는 그 메들리 테이프가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가수가 됐네요.
-그러다가 아예 셔터 내려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는?
그게 '비 내리는 영동교'를 3월달에 발표를 하고 방송 출연서부터 공연, 이런 것들이 스케줄이 많이 잡히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약국에 있을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한 9월달쯤에 접었어요.
-그 후에로 '눈물의 부르스',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 연이어서 히트를 했죠?
네, 정말 그때 참 좋았네요, 생각 해 보니까.
-30년 동안 공연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 있다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게 제가 KBS 가요무대 프로그램에서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서 위문 공연을 했었어요.
-사하라 사막에서 중동의?
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가서 달러를 벌어야만 했던 우리 땅의 아버지들. 그분들을 사하라 사막에 앉혀놓고. 그 공연을 잊지 못해요.
-그 모래바람 속에서 노래 불렀던.
어렸지만 노래를 하면서 이런 보람이 있구나, 노래하는 사람이 이런 역할도 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라고 어린 마음에 되게 벅찼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무수한 무대들에서 또 무수한 히트곡들을 부르셨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착 가는 곡은?
아무래도 데뷔곡 '비 내리는 영동교'가 제일애착이 가죠.
-'비 내리는 영동교'는 몇 번이나 부르셨을까요, 30년 동안?
숫자를 세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불렀을 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무대에서 불러야 했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럴때는 조금 지겹다는 생각 들 때는?
왜 안 그러겠어요. 제가 무대에 서면 제일 듣고 싶어하시는 노래들이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인데 매일 불러야 된다고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그래서 스스로 저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최면을 걸어요.
-30년 된 베테랑 톱 가수도 자신의 데뷔곡을 부르는데 부르는 무대마다 신인의 자세, 첫 스튜디오에 들어가던 그 자세로 노래를 부른다. 역시 다르네요. 그런데 가수 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나?
후회도 해 봤죠. 아이들 키울 때 그런 마음 많이 들었어요.
-미안한 생각이 들고. 하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이유는?
글쎄요. 제가 아마 노래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제 노래를 들어주시는 팬 여러분들이 있었으니까.
-주현미 씨 잘하셨어요. 그때 안 접으시길 잘하셨어요. 덕분에 이렇게 멋진 30년 무대를 볼 수 있게 된 건데. 9월 12일, 13일 서울부터 시작해서 지역 몇 곳을 돌게되는 커다란 무대. 멋지게 잘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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