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논설실장 |
관점뿐 아니라 시선 접촉도 문화권별로 상이하다. 우리는 똑바로 쳐다보면 불쾌하다 하지만 유럽이나 아랍권은 똑바로 안 봐주면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시선 관리'만은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엿보기와 드러내기가 문명화된 양상을 띠는 거리[街]에 나서 보자.
그런 공간, 특히 여름날의 거리는 '시선의 전투'가 뜨거운 무대다. 그 전투를 전국 450만개 CCTV로 감시한다고 눈 질끈 감을 수는 없고, 이럴 때는 쫄깃한 '토플리스 사회학'의 창시자 장 클로드 코프만이 존경스럽다. 중립의 눈으로 '다른 대상을 향하는 듯' 보는 기술, 덧붙이자면 누구처럼 '공연음란' 같은 길거리 성범죄는 절대 짓지 말아야 한다.
이 아이들은 관세음처럼 세상[世]의 소리[音]를 보고[觀] 있는지도 모른다. 영어 '보다(see)'는 '알다, 이해하다, 지켜보다, 발견하다, 상상하다, 만나다, 마음에 그리다'로 다변화한다. '아바타'라는 영화에서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내 눈에 들어왔어. 뜻밖의 모습들이. 너에겐 안 보이겠지만.” 드라마 몰아보기로 본 '조선 총잡이'에서 최혜원(전혜빈 분)이 던진 애처롭고 애틋한 고백이 알알하다.
이렇게 붓방아로, 입으로 떠는 천 마디 궁상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라.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동자부처(瞳子-)', '눈부처'이니, 살아서 부처 되는 유일한 길이 이것이다. 매일 출근길, 어머니가 먼 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심어놓으신 베고니아에서 어머니 모습을 본다. 보는 것, 시각이 감각의 윗등급에 앉은 이유를 제대로 알 것 같다.
보는 것에 감정까지 섞이면 눈맞추고, 눈이 맞고, 눈떠 가고, 눈에 나기도 한다. 눈은 또 귀와 함께 언론에 부여된 사명의 상징이다. 그렇게 쓴 역사가 길다. 16세기 학자 기대승은 제왕의 눈과 귀가 언로를 향해 맑게 열려야 한다고 했다. 중도일보는 눈에 쏙 들어오는 신문, 이해미 기자가 구성한 저 비행체 그림과 다르게 '앞뒤' 분명한 언론이 될 것이다.
눈을 더 밝힐 것이다. 그러려면 아바타 나비족처럼 눈, 마음, 교감으로 보고 또 사랑해야 한다. 아이 씨 유(I see you). 당신을 봅니다. 1951년 창간 때도, 1988년 복간 때도, 창간 63주년 이 아침에도 되뇐다. “눈이 될 것입니다.”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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