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돈 편집국장, 안영진ㆍ신한철ㆍ김형태 3人에게 길을 묻다
1951년 첫 신문을 발행한 중도일보가 창간 63주년을 맞았다. 6ㆍ25전쟁 전선의 소식을 전하던 창간호의 흑백 지면은 현재 대전ㆍ세종ㆍ충남ㆍ충북을 아우르는 종합 일간지로 성장했다. 특히, 지역언론 최초로 대전과 충남권역을 분리해 1ㆍ2ㆍ15면 갱판을 별도제작하고 있어 보다 가까이 독자들에 다가서고 있다.
기자들이 지역 곳곳에서 발굴한 기사를 통해 하루하루의 역사를 기록하며 독자의 눈과 귀가 되어왔다. 다양한 매체가 독자의 마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시대에 지역 신문도 예외일 수 없다. 중도일보가 1951년 처음 뿌리내려 지역을 지키는 둥구나무가 되기까지 헌신한 이들을 만나 나아갈 길을 살펴봤다.<편집자 주>
▲ 사진 오른쪽부터 유영돈 중도일보 편집국장, 김형태 한남대 총장, 안영진 전 중도일보 주필, 신한철 충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
보문산 사정공원 인근에 자리한 찻집 앞에는 200살은 거뜬히 됐음 직한 느티나무가 일행을 먼저 맞았다. 굵은 뿌리를 땅속 깊이 박고 어른 손바닥만한 이파리를 집채만한 넓은 가지에 촘촘히 붙잡으며 세월을 이겨낸 풍채를 지녔다.
느티나무를 뒤로하고 안영진 전 주필과 신한철 충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그리고 김형태 한남대 총장이 평상에 마주 앉았다.
유영돈 편집국장이 직접 초대한 이들 세 명은 중도일보의 역사를 몸에 새긴 이들이다. 안영진 전 주필은 1959년 중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 그리고 칼럼 기고자로 50여년 동안 중도와 함께 한 살아 있는 역사다. 그에게는 현해탄은 말한다등의 7편의 저서가 있고 고향 서산에 공적비가 서 있다.
신한철 회장 역시 1970년 입사해 '민완기자'의 명성을 높이며 중도일보 편집국장을 두 차례 역임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김형태 총장은 1970년 중도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 6개월 만에 군에 입대하면서 중도일보와 가족의 연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독자로서 중도일보를 애정 있게 지켜봐 왔다.
황무지에 뿌리내려 신문사를 성장시킨 선배답게 후배 기자들을 향한 우직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안 전 주필은 “일제 때 신문기자는 선구자요 애국지사로 통했다. 세상은 급변해 시대나 사회가 기자들에게 선구자이기 요구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며 “그래도 요즘 기자들은 적극성 같은 게 모자란 게 아닌가 싶다. 와이셔츠 시대여서 그런지 본인 책임이라는 우직한 면이 없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돈을 벌고 싶다고 기자를 시작했다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회를 밝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택한 길이라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며 “발자취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노력하는 기자는 하늘도 안다는 말이 있다”고 일침을 놨다.
“기자도 회사원과 뭐가 달라”라고 스스로 여기는 시대에 기자를 앞서 경험한 선배들은 “취재의 사명을 지닌 기자가 왜 회사원이 되려 하는가”고 회초리를 든 셈이다.
군사쿠데타의 계엄상황에서 삼엄한 통제를 받던 언론환경 이야기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안 전 주필은 “4ㆍ19사태와 5ㆍ16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언론은 통제됐고, 계엄사령부에 신문 가판을 들고가서 검열을 받던 시대였다”며 “점령군의 관계자가 전국의 편집국장이 모인 자리에서 언론통제에 협조를 당부할 때 마이크를 잡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집에 얘는 다 키웠냐며 나의 앞날을 걱정해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화는 중도일보 강제폐간과 재창간이 이뤄진 1973년과 1988년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안 전 주필은 “야성(野性)이 강한 지역 신문이었고, 회장은 충남 개발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마당에 군사정권에 그리고 영구집권은 눈엣가시로 봤고 강제폐간됐다. 그해 5월 24일자 신문을 끝으로 문을 닫았고 다음날 충남일보라는 새 제호로 대전일보와 합병됐다”고 설명했다.
신 회장은 “당시 이웅렬 회장이 충남발전을 위해 10가지 이상의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던 것을 봤을 때 지역에서 난 인물이기도 했지만, 군사정권에서 안팎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고, 강제폐간 즈음엔 심한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고 기억했다.
이어 안 전 주필은 “당시 기자들은 새로운 길을 찾거나 일부는 강제합병된 대전일보에 남아 기자생활을 이어갔으나 다시 복간되기까지 15년은 중도일보의 동면(冬眠)이자 유폐인 동시에 사장(死將)이었다”며 “중도일보는 위기를 극복하고 이겨낸 데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도일보와 처음 만난 인연도 특별했다.
김 총장은 “1969년 한남대를 졸업할 때 3년간 교내 학보사 기자를 했다. 기자가 퍽 적성에 맞았다. 글을 써 생각을 전달한다는 데 큰 매력이 있었고 졸업하면서 학보사의 경험으로 중도일보에 입사해 교열부에서 교정을 봤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조금 색다른 기억을 들려줬다.
그는 “1970년 당시 중도일보는 지금의 교보생명 빌딩 옆자리 작은 건물에 20평 됨직한 사무실을 사용했는데, 논술시험을 보러 갔더니 책상 바닥이 울퉁불퉁해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쓰기 어려울 정도였다”며 “초창기부터 알뜰하게 살림을 유지하면서 지역에서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군을 제대한 1973년 중도일보에 다시 복귀하려 했지만, 그때는 1도1사 정책으로 회사가 통폐합돼 돌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고, 결국 대성여고에서 영어 교사를 시작했다”며 “교사가 보수는 좋고 더 안정적이었지만, 세상을 넓게 보고 분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자라는 일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중도일보가 나아갈 방향으로 지역 소식을 더욱 자세히 전하고 정확히 분석할 것을 주문했다.
신 회장은 “다매체 다채널에 인쇄매체가 어려운 여건이다.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독자가 줄었다”며 “기사의 정확성을 확인하려 신문매체를 확인하는 독자들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역의 소식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사회적 의미를 쉽게 풀어 지면에서 설명하는 기능을 특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지방화를 이뤄야 한다. 서울발 기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사의 가치가 부실해질 수 있지만, 지역의 인물과 소식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도한다는 자세로 임하면 그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총장은 “홍수가 나면 물은 많은데 마실 물은 없다는 말이 있다. 지역 독자들은 전국 단위의 매체가 해결하지 못하는 지역소식에 갈증을 느낀다”며 “불특정 다수인이 신문을 읽지만, 내가 쓴 기사를 누가 읽을지 염두에 두고 실제 독자층에 집중한 기사가 나와야 한다. 장래의 단골 독자가 될 수 있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각에 맞춘 기사발굴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찻잔을 물리고 보문산의 숲길을 걸어 내려오는 길에 세 명의 초대인사와 유영돈 편집국장이 나란히 걸어갔다.
1951년 싹을 틔운 나무는 세월과 역경을 나이테 삼아 성장하며, 비ㆍ바람을 가려주고 어깨 기댈 나무가 되려 한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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