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중 건양대 대우교수(전 주일대사관 도쿄 총영사) |
며칠 전 금마의 미륵사지 부근에서 묵고 오는 길에 강경에 들렀다. 근대문화유산이 많다하여 벼르던 곳이다. 안내표지가 안 보여 골목마다 즐비한 젓갈집에 들어가 물어 간신히 역사문화안내소에 닿았다.
문화관광해설사 김형구씨는 “하는 일이 바쁘지만 강경 토박이로서 고향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나섰다” 며, 옥녀봉으로 안내했다. 해발 43m의 낮은 산이나 조망이 뛰어나 봉수대에서 보니 들과 강과 멀리 보이는 산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금강이 보이는 곳 바위에는 강경포구의 밀물과 썰물의 시각과 높이를 새긴 해조문(解潮文)이 있다. 이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신사지기(지금은 매점)에서 만난 김광경씨(70)는 “어린 시절에 옥녀봉에서 보면 포구에 배가 가득했는데 하구에 금강 둑을 만든 후로는 강경이 너무 초라해졌다. 살려야 한다. 그러나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 저 아래 보이는 최초 장소도 틀리다”라며 열을 올린다.
내려오는 길에는 前喬 등 일본인이 시주를 했다고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박범신씨의 소설 '소금집'에서 주인공이 가출하여 살던 집이 폐허 상태로 있었다. 산 밑에는 토마스 선교사 스토리가 있는 한옥의 교회가 있다.
적산가옥에 사는 이창수(76)씨를 만났다. “그 전에는 이 거리가 식당, 책방들이 즐비했다. 일본인들은 하얀 말을 타고 다녔다”며 회상했다. 강경역사문화연구원 김무길(73)씨는 “강경이 전국에서 근대문화자원이 가장 많을 것이다. 목포, 군산과는 다르다. 자연스러운 옛 모습으로 살리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강경은 원산과 함께 전국 2대 포구,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의 하나였고, 13개의 은행과 8개의 학교, 2개의 호텔이 있었다. 그리고 운송, 유통을 하던 객주가 10여명이나 되었다. “전라도, 경상도 사람은 먹고 살기 어려우나 강경의 강아지는 먹을 게 많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에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1924년에는 상수도가 들어와 인구가 3만 명에 달해 1931년에 읍이 되었다. 일제 초기부터 반세기 동안 번성했던 강경이 이젠 1만 여명이 조금 넘는 시골로 변했다. 상권도 젓갈 말고는 변변치 못하다. 필자가 본 근대문화의 거리는 살아 있었다. 멈춰진 강경의 물길을 사람의 발길로 되살리자.
첫째, 사업의 기본인 향토 사료를 더 충실하게 찾아내자. 포항의 구룡포나 군산처럼 고급스럽거나 한 곳에 모아 놓는 것 보다는 사람 냄새가 물씬한 서민풍의 거리가 좋다.
둘째, 강경의 문화유산은 유학사상, 산업, 교육, 종교, 항일, 6ㆍ25 등 다양하다. 근대역사문화와 함께 훌륭한 자원이다. 인근의 백제문화와 한옥마을, 단풍 등과 연계하면 수학여행의 명소가 될 것이다.
셋째, 김장철에만 반짝하는 곳이 아닌 SEPSS(See, Eat, Play, Study, Stay)의 장소가 되도록 스토리텔링이 있는 문화유산 이벤트와 요즘 대세인 오토캠핑 시설을 만들자. 강경의 상공인들이 '고향 살리기'에 적극 나서자.
넷째, 현재 추진중인 충청권 광역철도 사업의 기점인 논산과 강경의 접근성이 좋아지도록 노력하자. 그래야 발길이 잦아질 것이다. 또 호남선 KTX역도 가까운 곳에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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