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진 청양군기획감사실장 |
청양과 홍주는 지리적으로 인접 해 있을 뿐 만 아니라 예로부터 충절의 유서 깊은 고장으로 홍성과 청양을 일컬어 홍양지역 이라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양의병이 홍주의병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면을 광복절에 즈음하여 청양의병을 재조명코자 한다.
1905년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우부승지를 지낸 홍성의 이설과 김복한은 상소하고자 상경하였으나 경무청에 구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양의 면암 최익현도 을사5적 처단을 상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홍주향교에서 전교를 지내던 청양거주 안병찬을 비롯한 지역의 선비들은 “실권 없는 나라에 상소는 무슨 상소냐”며 거병할 것을 제의하니 수백 명의 우국지사들이 호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후 정산에 낙향하여 가산을 정리 거의 준비를 하던 전 참판 민종식을 응원군으로 최익현을 맹주로 추대하고 1906년3월17일 거병키로 하였으나 이틀 전 면암은 전북 옥구 임병찬의 건의로 호남지역에서 거의하여 후일 호서와 호남지역의 의진을 형성 호응하기로 약조하고 태인으로 거점을 옮기니 민종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로서 청양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홍주성을 공략하는 홍주의병에 불을 당 긴 것이 청양의병으로 청양은 홍주의병의 본향인 것이다.
민종식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의진은 청양장날인 3월 17일 계획대로 홍주성으로 출정을 하면서 중간지점인 광시장터에서 의병을 규합하니 모인 군중이 3천여 명으로 편대를 정비 3월18일 홍주성으로 진군을 했다.
경무성 경무국장 출신인 홍성군수 이교석은 조양문에서 의병을 회유 입성을 거부하였고 의병 수뇌부의 중의에 따라 공주로 말머리를 돌려 비봉면 중묵리에 이르렀을 때 공주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명이 청양읍에 휴식중이라는 소식에 화성면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관군과 일본군이 새벽에 기습, 의병 40여명이 붙잡혀 공주로 압송되어 의병의 1차 전투는 실패했다.
민종식은 5월12일 청양의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등과 부여 이용규의 협력으로 1000여명의 의병으로 다시 정비하고 홍산을 거쳐 서천읍을 점령 이종석 서천군수를 구금하고 비인과 보령 남포 전투에서 승리를 했다. 의병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광천을 거쳐 결성에서 1박을 한 후 홍주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성중에 포화를 퍼붓자 적군과 거류 일본인은 북문으로 달아나 예산으로 도망가 홍주성을 점령하니 청양에서 출정한지 63일 만인 5월 1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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