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논설실장 |
기본을 생각할 때 늘 소림사의 무쇠 솥단지를 떠올린다. 긴나라왕이 소림사 아궁이를 깨고 나와 홍건적을 퇴치했다거나 무예가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소림무술이 성행했다는 이야기의 진위는 여기서 의미가 없다. 다만 맑은 정신의 근력을 유지하려고 철봉에 매달리는 개인의 경험만으로 수긍하고 싶은 속설이 있다. 힘든 주방일을 버틸 체력을 기르려고 소림사 주방장이 무술을 익혔다는 주장 말이다.
▲당진 솔뫼성지 내 김대건 신부 생가터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공동취재단 |
이런 이유에서도 쿵푸(공부)의 세계는 사부님이 중요하다. 노벨상 스승 밑에서 노벨상 제자가 나온다. 경영전략으로도 차용되는 칼잡이 야마모토 무사시는 예외였다. 스승도 유파도 없는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공격하려는 순간, 누구든 일순 자세가 흐트러진다. 이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선(先)의 선(先)'의 검법, 간발의 차이로 앞질러 공격하는 기본기를 위해 얼마나 목숨을 건 자기수련을 견뎠을 것인가.
하다못해 강아지를 키워도 기본훈련, 복종훈련, 서열정리, 배변훈련을 거친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두고두고 주인 고생이다. 사람도 기본이 덜 되면 설득도 통솔도 제일 어렵다. 기본 없음, 기본에서 빗나간 사회를 고대사회에서도 '말세'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은 먹을 걸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고 힐난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구절은 4000년 전 검은 돌기둥의 함무라비법전에 새겨져 있다. 노약자석에 앉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젊은이를 두고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과 서로 빙의된 느낌이다.
어느 시대건 내 문제는 '세상 탓', 남 문제는 '사람 탓'에 떠미는 행위자-관찰자 성향이 있었다. 내가 행위자인 내 문제와 달리, 내가 관찰자인 타인에는 상황적 제약이 무시된다. 내가 지각하면 교통 때문이고 남의 지각은 꾸물거림이다. 사람으로 안 되면 '연장' 탓이다. 천대만대 네 탓만 한 불의한 인류는 당대 말씀들로 미뤄 천 번이고 망했어야 하는데 건재한다. 이는 개뿔 같아 보일지 모를 원칙과 정도(正道), 양심과 정의가 남아 사회ㆍ국가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어서다.
그러한 양심과 정의를 요 며칠 간 낮은 곳에서 작은 이들을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발견한다. 교황이 대전 미사에서 강론한 '정신적 가치와 문화'는 종교를 넘어 문화와 문명 진화의 기본이다. 종교라도 기본에서 멀면 이단, 사이비가 된다. 딱 1년 전 8ㆍ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기본이 바로 선 국가”를 역설했다. 기본이 무너진 사회에서 기본에 충실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기초와 기본을 건너뛰고 심화 단계에 진입하지 못하는 점은 공부 원리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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