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5년 경부선 철도 완전 개통(상). 토지·자본 착취한 동양척식회사(중).1932년 충남도청 대전으로 이전(하). |
대전역이 설치되면서, 대전천과 대동천의 합류지점인 저습지에 100여명의 일본인 군인, 경관과 88인의 이민단이 정착했다. 그들은 용달업, 토목·건축 청부업, 여관업, 상품 판매업, 운송업 등을 시작하였고, 소규모의 제와공장 등이 자리잡았다.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고 1909년경 대전에는 일본인 인구가 2500여명에 달하여 대전역 부근인 지금의 원동(本町通), 중동(春一町通), 정동(榮町通) 지역에 일본식 거리를 이루었고 일본인 거류민은 일본풍의 시가지, 소위 '혼마치'를 형성해 도심을 확장해 나갔다.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경부선 철도와 분지점인 서대전역이 설치되면서 비교적 협소한 동부의 저습지에서 벗어나 대전천을 넘어 서부 지역으로 시가지 확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경부선과 호남선이 대전을 통과하게 되면서 수로 대신 육로를 통한 이동이 활발해졌다. 금강 물줄기를 통해 공주나 강경으로 집하하던 화물들이 철도를 통해 대전으로 모여 들었고, 전라도나 경상도 사람들도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대전을 꼭 거치게 되면서 대전은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도시로 성장해 갔다.
일제강점기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대전면이 신설되면서 대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일본인들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상권까지 지배하면서 큰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누릴 수 있었으며, 더욱 더 많은 부귀와 영화를 위해 조선인들의 토지와 자본을 착취하는데, 그 중심축에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등이 있었다. 조선 식산은행은 1906년부터 각 지방에 설립된 11개의 농공은행을 1908년에 6개로 통폐합하고 1918년 다시 합병해 창립한 은행으로 상공업자를 상대로 일본인들의 부를 축적하려는 근본목적이 있었으며, 또한 채권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정부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이었다.
충남도청 이전과 대전= 대전의 팽창은 1920년대에 들어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 이전 문제를 숙제로 남겼다.
충남도청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는 대전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여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진주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4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되면서 대전 사람들도 도청 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공주 지역민들과 공주 유지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면서 대전은 철도 중심도시에서 지방행정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경찰서, 형무소, 우편국, 각종 학교, 식산은행 지점, 대전 피혁 등 각종 관공서와 회사들이 들어섰다.
대전 중심가에 상수도와 가로등이 설치되고 대전역에서 신청사까지 도로가 직선도로로 확장되었고 대전의 서부지역인 선화동, 용두동, 대흥동 등이 발전하게 되고 경부선의 복선화에 따라 대전역을 확장하였다.
1932년에 대전으로 옮겨진 충남도청은 '80년 대전시대'를 마감하고 내포신도시로 이전 했고 현재의 구)충남도청은 2013년 7월부터 대전 시민들의 삶의 진리향상을 위한 시민대학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연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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