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표 대덕대 총장 |
용서와 화해를 통해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을 이끌어내는 것은 종교의 기본적 기능과 역할이다. 선처를 얼마든지 탄원할 수 있다. 그러나 공판을 코앞에 둔 시점에 선처탄원서를 낸다는 것은 공판 때 마다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된 무 경우 시위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국가 안위'와 관련 있는 '내란 음모'라는 형사 사건인지라 더욱더 이해되지 않는 탄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뒤엎으려는 행위라 하더라도 회개와 반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들이 뉘우치고 반성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놀랍게도 법정에서까지 적화통일을 운운하다 못해 종교 말살 정책을 펴는 북한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국민 화해와 통합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결국 잘 봐달라고 호소를 한 것이 새로운 분열과 갈등의 불씨를 점화하고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고문을 받거나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양심수'가 아니다. 민주화된 국가의 기간 시설을 폭파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형사피고인들을 어떻게 선처해달라는 것인가.
탄원서에는 “누가 어떤 죄를 범했든 도움을 요청하면 그 죄를 묻지 않고 기도해 주는 것이 종교인의 자세”라는 표현이 있다. 옳은 말이고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염원을 담은 간곡한 기도의 차원을 넘어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는 탄원서를 냈다. 탄원서를 내는 행위가 기도는 아니다.
기도를 한다면 반성과 회개를 전제로 왜 기소되었는지 뒤돌아보기를, 또 한쪽은 양심적인 판결로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반성과 회개는 물론 앞으로 헌법질서 수호나 화해, 사회 통합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혐의 모두가 조작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할 뿐이다.
또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어리석은 갈등으로 국력을 소진하기보다 서로 간의 이해와 포용이 허용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있다. 표현 자체를 거부할 이유는 없으나 북한과 연계를 바탕으로 무장 폭동을 일으키려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일을 '어리석은 정치적 갈등'으로 보고 있다는데 문제의 여지가 있다.
본질을 따져 가리는 것은 누구에게 어떠한 간섭도 받아서는 안 되는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단뿐이다. 이미 1심에서 판단을 내린바 항소심을 앞둔 시점에 탄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래서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말미에 '공정한 재판을 해 달라' 고 당부를 한 것도 그렇다.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표현 같지만 1심에서 공정하지 않았으니 똑바로 하라는 겁박으로 비춰질 수 있다. 결코 말꼬리를 잡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도 개인의 입장이나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한 시민으로 정치적인 의사표현이나 행동을 할 수 있지만 대표로서 참여하면 개인이 아닌 신앙 공동체의 정치활동으로 종교가 국가를 간섭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종교와 국가의 분리라는 틀 속에서 여ㆍ야, 진보ㆍ보수를 막론하고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가꾸는 것은 소중한 덕목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민주화 된 나라의 대명천지에 '대선불복'을 선동하는 자리, 제주 해군기지를 '해적 기지'라고 하는 현장 등 소위 크고 작은 갈등의 장소에 섞여있는 종교인들을 본다. 그때마다 미숙한 자신의 신앙을 탓하고 반복하며 혼란을 겪는다. 배신감에 허탈감이 더해진다. 종교인의 향내 나는 삶을 본받아 영적 성장을 원하는 평신도들이 종교인을 걱정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린다.
15일엔 1984,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에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와 124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시복하기위해 방한하는 희망과 위로의 아이콘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 한다.
그의 기도로 통일-동서화합을 비롯하여 비정상적인 적폐가 정상화 되어 이 땅에 하루빨리 일치-화해-평화가 뿌리 내리기를 간절하게 기구한다. 이후에는 종교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하나같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응답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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