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부채가 아니더라도 부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지 손에 쥐고 바람이 일도록 부쳐대곤 하였다. 심지어 손바닥 자체도 부채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요즈음도 판촉물이나 홍보용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채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왠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부채라고 하면 으레 대나무 부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부채는 그 소재 자체만으로도 대나무만큼 시원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 만큼 관습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대나무의 질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부채 가운데서도 대나무를 얇게 쪼개서 여러 개를 묶고 종이를 붙여서 마음대로 접었다가 펼 수 있도록 만들어서 언제나 손에 쥐고 다닐 수 있도록 한 쥘부채 또는 접선이 있다. 이 쥘부채는 고려시대 발명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단순한 쥘부채가 발전하여 대나무 가공에서부터 물소 뿔 손잡이 가공, 종이 재단과 접고 붙이기 공정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세계 유일의 합죽선이 있다. 합죽선의 마지막 공정에서 대나무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기술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낙죽이다.
낙죽은 불 인두를 가지고 여러 가지 무늬를 그려 넣는 일을 말한다. 매우 독특한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대나무 등에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할 때는 새김질을 한다. 그런데 낙화는 대나무 표면을 불 인두로 지져서 여러 가지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나무는 겉면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 미끄럽고 단단하여 물감이나 안료들을 잘 머금지 않기 때문에 새김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새김 방법과 함께 불로 지져 무늬를 베푸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낙죽에 쓰이는 불 인두는 독특하게 생겼다. 인두가 원뿔대 모습으로 생겨서 끝 부분은 바늘 끝처럼 뾰족하고 날카롭다. 원뿔대 모습으로 생긴 뭉툭하고 두툼하게 생겼는데, 열기를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한 과학슬기가 돋보인다.
숯불 화로에 빨갛게 달구어진 불 인두로 손놀림을 때로는 빠르게 하고 때로는 느리게 하면서 불 인두의 열기를 조절해가면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무늬들을 베푼다. 가히 신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솜씨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에 걸친 땀의 결실이다.
정동찬ㆍ국립중앙과학관 과학사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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