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논설실장 |
다른 무엇보다 이 신드롬의 원천은 이야기성의 힘이다. 417년 전 역사가 칙칙한 현실의 대안 역사로서 우리들 마음에 닿은 무언가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2300여년 전 인간 행위의 재현(미메시스)과 잘 짜인 뮈토스(플롯)를 강조할 때 시작됐던 일이다. '사건의 틀'을 달리하면 시공을 넘어 보편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런 증거 하나를 더 확보했을 뿐이다. '성웅 이순신'의 로망스가 '칼의 노래'에서 비극이다. 공주대 김덕수 교수에게 이순신은 '맨주먹의 CEO'요, 아산처럼 이순신 장소성을 가진 지역은 좋은 밑천이다. 영화 '써니'의 엑스포과학공원, '7번방의 선물'의 대청호반, '변호인'의 구 충남도청, '해결사'의 한밭수목원을 엮으면 삶의 자세를 다잡는 원기소가 된다.
운 좋으면 대전 풍광을 매개로 지역 관광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다. 이순신 열풍 역시 돈이 없다며, 돈이 안 된다며 깨작거리는 사업들이 얼마간 상승기류를 탈 것으로 보인다. 아산, 천안, 공주에 걸친 백의종군로 사업을 봐도 경남, 전남 쪽에 비해 부진을 면치 못했었다. 가슴 쓰린 회상도 있다. 젊은 이순신이 무예를 닦던 아산 방화산 임야가 법원 경매물건으로 나와서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미륵사지 발굴 때의 허탈감은 또 어땠나.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의심받을 때 “지금 이대로가 역사”라며 사설(社說)로 애인 잃은 듯 애석해한 적도 있다. 그 직후 어느 세미나에서 “그럼에도 선화공주를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소장파 역사가를 봤다. 궁남지 서동설화, 드라마 서동요, 충화면의 서동요 세트장 모두 솔직히 아까웠다. 그런데 이즈음 자치단체 스토리텔링 공모전 등에서 문화콘텐츠랍시고 은근슬쩍 찔러 넣는 허구가 신경에 거슬린다.
도를 넘어 때로는 아주 노골적이다. 과거가 실재이면 역사는 숙명적으로 이야기지만 오락과 문학예술 언저리의 조작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황산벌'에서 백제 의자왕, 신라 김춘추, 고구려 연개소문, 당 고종이 4자회담을 벌인다. '불멸의 이순신'에선가 이순신과 원균은 불알친구로 나온다. 정책과 시설, 콘텐츠가 안 먹히면 이런 식의 '거짓말' 유혹을 받는다. 그 예를 화성 병점떡전거리 축제에서 봤다. 이몽룡이 남원 가다가 병점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며 난데없는 합격떡에 버무리려 했다. 마케팅과 스토리에만 몰두하다가 무리한 작법이 나왔다.
지금의 역사 이야기―혹은 역사가 아닌 이야기―는 이야기에 대한 열망이다. 전통문화콘텐츠위원회까지 만드는 자치단체들은 이걸 놓치지 않는다. 천안은 능소와 박현수 부활에 애쓰고 있다. 예산 황새공원에도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세종시는 워싱턴 DC와 비교하면서 세종대왕 눈병 특효약인 전의 초수를 관심 끄는 훅(hook)과 관심을 유지하는 홀드(hold)로 삼으려 한다. 다들 열심들이다.
이런 것들의 간절함이나 효용성을 떠나 요즘 깨달은 바가 있다. 아우슈비츠의 티타임 이야기를 읽고서다. 수용소에서 멀건 찻물을 다 마시는 사람과 절반만 마시고 남겨 얼굴을 씻는 사람 중 동물적 본능보다 인간다운 본성에 따를 경우의 생존율이 높았다. 문화콘텐츠에도 이같이 흥분되는 의미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속 계산기의 비용과 편익은 돈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지난해 140만명이 찾은 괴산 산막이옛길도 26가지 이야기의 힘이 컸다.
그 일원이 되어, 알고 걷기와 그냥 걷기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며 걸어봤다. 깨알재미 뒤로 간간이 작위성이 묻어났지만 역사 이야기는 어차피 허구적으로 사실을 이야기하거나 사실적으로 허구를 이야기하기다. 그렇다 해서 무협지 속 비급인 '귀화보전' 같은 문화콘텐츠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다. 왜 이 시대에 그것인가라는 마크 아이디어와 그 지속성이 올바른 지역경제 사용법일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행위가 다름 아닌 스토리텔링이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에 따라다닐 '이어약(利於藥)'이라는 이야기의 약도 마케팅과 효과에 치중하다 지나치게 달거나 쓰거나 과잉 처방이면 곤란하다. 예산 여사울성지, 당진 솔뫼ㆍ신리성지, 서산 해미성지를 잇는 순례길에 곧 이야기가 깔린다. 이야기는 힘이 세지만 유일한 답이 아님을 함께 알아두자. 바로 '명량'이 그걸 적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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