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
그 기원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인데 남녀가 혼인하기로 약속을 하면 처가에서는 뒷마당에 서옥이라는 작은집을 짓는다. 해질 무렵 남자가 처가의 집에 찾아와 꿇어 앉아 자신의 이름을 대면서 그 집에서 하룻밤 잠자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낙을 받으면 그 날부터 서옥에 머물면서 처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도 하고 결혼생활을 위해 재물을 마련하여 자식이 장성하면 비로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고려시대 역시 같은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남자가 장인 집에 머물면서 처가 집을 위하여 신부봉사까지 하면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머슴 같은 고달픈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어머니의 가족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지만 그만큼 아버지 쪽은 아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들의 희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의미 있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하지 않는다.”라든지 “처갓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 등 이다.
이러한 처가살이로 아이들은 외갓집에서 자라다보니 외가의 풍습을 배우게 되고 외가 쪽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어 남자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외가에서 그 위세를 떨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이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태종은 그의 아들인 세종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의 외척들은 제거한 것은 바로 외가의 권력농단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 당시에 정도전은 이러한 처가살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던 시집살이로 혼인제도를 바꿀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시집살이가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친영례(親迎禮)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지켜온 풍습인 처가살이가 하루아침에 쉽게 변하지 않았고 중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관리들에게 이러한 친영례를 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시집살이는 아마 조선시대 후기에 비로소 정착된 제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혼인제도가 근간을 이루는 것이 사례(四禮)인데 이것은 중국의 육례(六禮)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가 의혼(議婚)이라는 것으로 혼담을 주고받는 단계로서 이러한 의혼이 많이 들어오는 여자의 집안은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양가에서 혼인의 의사가 접근되면 신랑 측에서 납채(納采)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게 신랑의 사주를 담은 사주단자를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에 신부 측에서 신랑과의 궁합을 보고 좋으면 혼인일자를 정하고 그 내용을 적은 연길단자를 신랑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로 납폐(納幣)를 하게 되는데 바로 신랑 측에서 예물을 담은 함을 신부 측에 보내는 것이다. 혼례식 전날 함지기가 신부 집에 가게 되는데 신부 집에서는 받은 함을 백설기시루 위에 놓고 부부가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 때에 함지기에게 노자 돈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함 값이다.
그런데 이러한 납폐단계에 이르면 혼례식을 치루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파혼이 불가능하게 되고 이후 사고로 신랑이 사망한 경우에도 신부는 결혼한 사람으로 청상과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계속)
법무법인 저스티스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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