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메뉴를 보며 웃다 보니 문득 두어 주 전에 받았던 어느 학생의 메일이 떠올랐다. 직전 학기 내 수업을 잘 들었다는 인사와, 기대보다 좋지 않은 성적에 대한 속상함과, 한번 연구실로 찾아와 진로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내용의 제법 긴 편지였다. 마음이 짠~해진 나는 그 학생의 시험지와 보고서 등을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빠짐없이 출석했고(성실하군), 객관식도 주관식도 정확하게 채점이 되었고(그래도 점수는 어찌할 수 없고), 보고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역시 자기 표현은 잘 하는구나). 여하간 학점은 위에서 네 번째 등급인 B0 이었다.
사실 B학점은 낮은 성적이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A가 아니면 나쁜 점수라고 생각하고 속상해 한다. 저학년에서는 시원치 않은 성적으로도 큰 걱정 하지 않고 다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 학생들은 일찍부터 성적관리를 하고, 자기가 왜 낮은 점수를 받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점수에 매달리는 모습이니 교수 입장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 학생처럼 자기 성적을 받아들이면서도 아쉬움을 표현하는 학생인 경우에는 교수의 마음도 안타깝다. 시험이야 어찌 보았든 잠재력이 큰 학생이기 때문이다. 하긴 아직 크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앞으로 '클 놈'들이다. 현재의 부족함을 돌려서 생각하면 앞으로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지표를 맞추기 위해 가차없이 상대 평가를 적용해야 하는 교육 시스템을 원망하며 '클 놈'에 대한 인격적 예를 갖추어 최대한 자상하게 답장을 썼다. 답장뿐만이 아니라 개강을 하면 그 학생을 불러 차라도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눌까 싶었다.
흔히 사람들은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 배운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수나 실패를 경험하는 것 자체만으로 배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배움의 핵심은 경험에 대한 성찰과정이다. 그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석해보고, 자기 자신에게 그 경험이 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 무엇을 고쳐야 할 지 알 수 있다. 당일치기 습관 때문인지, 시험을 만만하게 생각한 오만 때문인지, 시험불안이 심한지, 컨디션이 나빴는지 등등.
긍정의 힘이 우리를 성공적인 삶으로 이끈다고 한다. 그런데 잘 한 것만을 기억하거나 못한 것도 잘했다고 각색하는 것이 긍정은 아니다.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긍정이고, 이것이야 말로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가 된다. 그러나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더욱이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학생을 만나 아쉬운 마음을 들어주어야지, 기대에 못 미쳐 속상했겠다고 공감해주어야지, 내가 미처 모르는 너의 장점은 무엇이냐고 물어야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리라. 하긴 방학을 지내는 동안 스스로 깨우치고 돌아와 나를 감탄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큰 놈' 들의 성과는 멋지고 대단하다. 그러나 '클 놈' 들의 좌충우돌 성장기 또한 살 맛 나는 세상이라고 느끼게 해준다.
지식이 홍수처럼 넘치는 이 시대, 교육은 지식 전달에 급급할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일로 위축된 작은 이들에게 '클 놈'이라 말해주고, 강점을 찾아주며, 자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큰 놈'에 대한 칭찬도 중요하지만, '클 놈'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소통이 더 많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큰 놈'보다 '클 놈'이 훨씬 더 많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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