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춘당공원의 호연재시비 |
여기, 조선후기 이 곳 대전 땅에 살며 외롭게 지내다 외롭게 죽은 한 여인이 있다. 그녀에겐 사랑도 부도 명예도 없었다. 고통뿐인 현실 속에서 '시(詩)' 하나만을 품고 살았으며, 시를 통해 세상 모든 욕망을 비우고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전투를 치르듯 맞서 싸우며 걸었던 고단한 길은 시가 되고 문장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성리학적 명분아래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여지던 조선시대는 여성에게 복종과 인내만을 요구하던 시대였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뜻을 펼치지 못했던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습에 묶여 힘들게 살아가야했던 우리 고장의 인물, 김호연재가 있다. 그녀는 동 시대의 이름난 여류작가인 허난설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작품들을 쓴 명 문장가였다.
▲김호연재의 삶(1681~1722)=우의정을 지낸 선원(仙源) 김상용(尙容)의 후손이며,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로 충남 홍성 갈산 오두리에서 태어났다. 또한, 대전의 인물로 첫손 꼽히는 송준길의 증손부로 친가와 시가 모두 당대의 지체 높은 명문가였다. 5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난 호연재 김씨는 서로 시 짓기 내기를 하던 금실 좋은 부모 밑에서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지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둘째 아들 송병하의 며느리로 시집와 이 곳 계족산 자락 아래 산 깊고 물 맑은 송촌 땅에서 자리 잡고 살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석자의 시린 칼'처럼 (시 '야음') 고달팠으며, 마음은 '암담하고 괴로우니 늘 적의 뜰에 있는 것'(시 '촉오형')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고향에서의 추억은 늘 그리운 것이어서 '마음은 고향의 달빛을 따라가니 밤마다 서쪽으로 흐르지 않은 적이 없네'(시 '촉사형')처럼 많은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제천 현감으로 있었던 형의 집에 가서 지내는 등 늘 집을 비웠고, 서른 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리면서 살림을 살아내야 했다.
그리고 천지에 기댈 데 없는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호처럼 호연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던 그녀는 열아홉 살에 시집와 어린 두 형제를 남기고 마흔 둘이라는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200편이 넘는 시를 써냈다. 시가 그녀의 유일한 분출구였으며 최고의 낙이었다.
▲ 송용억 가옥 외경 |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 샘에 비낀 별빛 맑은 밤 /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 마음은 한점 등불이어라 /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야음 )
하지만 그녀는 주저앉아 한탄하고만 있는 나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의 호처럼 당당하고 도 호연한 기상을 잃지 않았는데 쌀이 없어 친척인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면서도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며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당히 밝히고 있다.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구름과 물, 사립문 호연함을 즐기네/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삼산군수에게 쌀 빌리니 이 또한 호연한 일일세' (걸미삼산수)
시를 주고받는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한 유년생활을 보낸 호연재는 송촌의 은진 송씨 가문으로 시집 온 후 남편의 부재 속에 혼자서 궁핍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술과 담배로 시름을 잊고, 시로 마음의 위안을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추측하듯 불행한 삶을 살다간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그녀의 삶을 가슴으로 옮겨 적으며 작품집을 만들었던 후손들이 있기에, 또 세월 속에 잊혀지고 묻혀 갈지도 모르는 그녀를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많은 학자들이 있으니 이제는 행복하지 않을까?
매년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가 문희순 박사(충청문화연구소)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5월부터 시작된 행사는 오는 27일 '김호연재의 시와 음악, 그리고 장사익'이라는 음악회로 이어진다. 이러한 행사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움직임을 만들어 우리 대전의 인물인 김호연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맘이다.
한소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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