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충남 경영자총협회장, (주)기산ㆍ경림엔지니어링 회장 |
에어컨을 틀고 창가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비록 실내온도는 낮아져서 서늘해도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로 목에 이상이 나타나고, 코에서 부담스럽다는 기별이 온다. 얼른 전원을 내리고 앉으니, 다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또 있다. 혼자라는 사실이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고, 외로움만이 진드기처럼 달려든다.
그래, 이런 날은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현실에서 끄집어내어 현재를 망각하게 하는 것은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 뒤 밤나무에 매어 놓았던 그네를 타고 하늘을 날 듯 훨훨 날아본다. 시원하게 하늘을 가르며 치솟으면 언제 왔는지 바람이 귓전에 와서 애무한다. 이 여행길에 빠져들면 나의 몸에 붙어 있던 더위와 외로움은 서서히 떨어져나가 어디론지 사라진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더위가 찾아오면 골바람처럼 우리에게 나타나 즐거움을 주던 것은 여름방학이었다. 어쩌면 학교에 나가던 때보다 더 아름답게 내게 남아 있는 추억은 방학이었는지 모른다. 바지랑대 끝에 비닐봉지 매달고, 잠자리를 쫓던 일, 감나무를 살금살금 기어오르며 제 노랫소리에 취해 있는 매미를 잡던 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바랭이, 명아주, 질경이, 강아지풀, 취나물, 우산나물, 고사리 등을 채집하여 책갈피에 끼워 넣고 무거운 다듬잇돌로 눌러 놓던 일…, 어디 그 즐거움이 곤충채집 식물채집뿐이랴.
아침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싸리비 하나 덜렁 들고 집을 나선다. 둥구나무가 있는 놀이터에 도착하면 벌써 철수도 나왔고 순이도 나와 있다. 우리는 방학 때면 어린이들끼리 자율적으로 모여 보건체조도 했고, 동네 길도 깔끔히 쓸었다. 더러 늦거나 빠지면 선배들이 엎드려 뻗쳐도 시켰는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그 일을 부모님께 고자질하거나 꾸지람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이 사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자랐다.
아침 수저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모님 따라 콩밭으로 나가 풀을 맬 때면 왜 그리 밭골은 길던지…. 꾀병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했건만, 형은 저만큼 나가 있고 언제나 나는 뒤에 처져 있었다. 겨우 밭일을 마치고 사랑방에 들면 방학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엎드려 한참을 하다보면 역시 지루하다. 그러면 슬며시 방에서 빠져나와 냇가로 향한다.
냇가에는 벌써 멱 감고 있는 친구가 여럿이다. 훌훌 바지를 벗어던지고 물로 뛰어든다. 먼저 온 친구들이 환영이나 하듯 물세례를 퍼붓는다.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물장구질이다. 물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송사리 떼가 달려들어 종아리를 간질인다. 그놈들과 동무해 주며 한참을 놀다가 입술이 새파랗게 식으면 우리들은 물에서 나왔다. 뜨거워진 바윗돌에 귀를 대고 귀에 든 물을 말린다. 그러면 바윗돌에서는 솔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밀대방석을 펴고 두레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하는 저녁식사는 행복 바로 그 자체였다. 낮 동안 있었던 일은 물론, 방학숙제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두레상은 치워지고 모두가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게 되었다. 누가 칭얼대었는지 벌써 어머니의 옛날이야기는 가운데에 와 있다. 한참을 듣다 보면 언젠가 들려주신 이야기다. 그래도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왜냐하면 형들의 배려로 어느새 모깃불은 타오르고 있었기에 우리는 별자리를 헤아리며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아무리 달려가도 끝이 없고,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것의 끼어듦을 용납하지 않기에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더위를 잊게 해 주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시절에는 서로 화목함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믿음이 있었고, 신뢰가 있었다. 지금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골바람처럼 우리의 몸을 식혀주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더위를 피하는 방법의 하나는 과거로의 추억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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