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논설실장 |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안길강(허목수 역)의 대사.
중도일보 충남총괄본부 개소식에서 '문화토크' 코너에 대해 인사치레로 말 건네는 내빈들이 있었다. 인상에 남는 것은 충남발전연구원 정종관 연구실장의 '고사성어' 관련 언급이다. 사교성 칭찬(?) 일색이지만 고사 풀이 코너처럼 안 보이도록 조심하겠다는 분발심도 스스로 갖게 한다. 이런, 방금 이러고 또 한자 성어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반외팔목(盤外八目)이 있다. 바둑판 밖에서 보이는 8집― 훈수꾼이 판을 더 잘 본다는 이야기다. 당국자미(當局者迷) 방관자명(傍觀者明)도 그런 뜻이다. 상대의 자리,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거기부정(擧棋不定)이라고, 대중없이 막 두어도 안 된다. 바둑판 앞에 아무도 없는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심경도 필요하다. 마이크 앞에서, 원고 앞에서도.
산다는 것이 방법적 기술로는 수읽기와 같다. 지게 되는 패착(敗着) 한 수에 고꾸라진다. 김용의 『천룡팔부』에 구마지가 모용복에게 “변과 귀가 있는 싸움에서 못 빠져나오면서 어찌 중원을 다투려오?”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정치인들이 있다. 선거판도 상대 실수로 이기는 '손님실수'에 기댄다. 중국에 가면 신선놀음에 '난가(爛柯)', 즉 '도끼자루 썩는다'는 난가산(爛柯山)이 있다. 지금은 초읽기로 제한하지만 1년 넘게 둔 기록이 나온다. 장고, 악수, 사전 포석, 망함을 자초하는 자충수 등의 바둑용어는 일상화됐다. 함축성이 좋아 편집기자들이 즐겨 쓴다.
문제가 지속되는 바둑판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회심의 승부수는 그만한 리스크를 각오해야 한다. 대마까지 빈번히 죽는 바람에 대마불사(大馬不死)는 물거품이 된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사회에서 위험한 건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라 했다. 과신, 맹신에서 우러난 욕심이 무리수를 부른다. 망해도 본전 찾는 전술의 탄력성이 요구된다. 돌 몇 개 미끼로 던지는 사석전법에 말려 죽는 수가 있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한 수 차이에 형세가 기우뚱하는 바둑이 인생을 닮긴 했다. 가끔은 4개의 고속도로를 타는 금산~내포 길처럼 복잡하다. 기자절야(棋者切也), 바둑은 끊는 것. '신의 한 수'에서 “4, 13, 끊어”라는 '배꼽' 이시영의 '몰래 훈수'가 나오지만, 잘 끊어야 산다. 복기(棋)하면 늘 아쉽다. 정석(定石)대로 살 수도 없다.
그러긴 하지만 돌[石]은 강력한 상징물이다. 초반부터 열심히 집 짓든지(실리 바둑), 세력을 쌓아 중ㆍ후반 대마를 잡든지(세력 바둑) 원하는 목적지, 새 지점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돌과 돌이 세력을 이뤄 번성한다. 단비 머금은 옥수수밭 사이로 듬성듬성 들어선 내포 신도시 관공서 건물들은 '초반 30수' 포석을 잘한 바둑 대국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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