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
그런데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아쉽게 16강에 진출하지 못하고 돌아온 23명의 전사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대하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의 오래된 친구이자 국가적 재난과 어려움에 지쳐있던 2014년에 위로가 되었던 벗이었다. 그래서 이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많은 응원을 보냈고 힘을 실어주었으며, 당연히 16강 정도는 합류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런데 16강에 탈락했다 해서 열심히 싸우고 돌아온 이들을 향해 고작 공항 바닥에 엿이나 던지며 문전박대를 해야 하는지,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리도록 아프다. 아프다 못해 화가 난다.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한일국가대표팀 16강 탈락 후 공항귀국 장면' 사진을 보니 더욱 마음이 착잡하다. 일본 선수들은 공항 귀국 후 엄청난 인파속에서 환영받으며 걸어가는 모습이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바닥에 널려 있는 엿을 보며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일본이나 우리나 브라질에 가기 전과 후에 달라진 것이라곤 단지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16강에 들어가면 우리의 친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친구가 아닌가? 혹여 16강에 진입했다면 인천공항에서 꽃다발을 안겨주었을까. 아니면 8강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더 큰 엿으로 내팽개쳤을까? 이번에는 8강까지 간 후 4강에 들지 못하면? 결승까지 가지 못하면? 원래 목표는 어디였을까? 이제 그들은 우리의 옛 친구가 아닌가?
왜 우리는 일본의 축구 서포터스처럼 잠깐의 여유와 따듯한 위로의 말을 해 주지 못할까? 여기에는 한일간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도 그 바탕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라고 한다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철저한 계급카스트제도 속에서 질서와 계층제도에 익숙해 온 문화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란 책에서 보면, 일본인들은 친구 사이에도 처지가 바뀌면 그에 알맞은 존경을 표한다고 한다.
가령 민간인이었을 때 편하게 말을 하던 관계라도 그 중 한 친구가 제복을 입게 되면 다른 친구는 그 친구에게 경례를 하는 식이다. 물론 제복에는 군복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의 상승 혹은 변경에 의한 계층제도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계층의 변화에 순응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문화가 나리타공항에서도 나타났다. 비록 월드컵 16강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국가를 대표했던 '계층'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고 질서를 앞세우며, 외국인 감독에게 까지 수고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1등만 최고로 여기는 '세상'에서 자란 객관식 단답형 7080세대인 우리는 그 맥을 끊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는 더욱 잔인한 정답 고르기 세상을 고스란히 남겨 주었다. 그러다 보니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중고생들마저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1등만이 최고이고 승리만이 정의이고 과정보다는 결과만 보려고 한다. 물론 자존심은 상하지만 16강 진출 좌절은 잘못이나 범죄를 일으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는 축구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약일지 모르나 내 자식이 성적 떨어졌다고 엿을 던지거나 '내 자식은 죽었다'라는 현수막을 거실에 걸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 성적은 전략 부재와 노력 부족 정도로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한민국전사들, 혹은 내 자식을 과대평가하여 스스로 기대치를 높인 우리의 잘못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는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정확한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으로 예측 가능한 축구를 준비하여 2018년을 기대하는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기억할 것은 패배의식이 아니라 반구저기(反求諸己)로 심기일전하는 용기와 투혼을 발하는 정신력을 갖추는 것이다.
늙어갈수록 뒷모습이 폼나고 싶다면 옛친구를 쉽게 버리거나 평가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지금 일본이 폼나게 멋있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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