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족산성남문 |
대전은 여러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며 도심 가운데로 갑천, 대전천, 유등천이 흐르는 살기 좋은 곳이다. '대전'이란 지명은 넓은 들 '한밭'을 한자화한 것이다.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의 정상에는 새의 둥지 같은 산성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수가 40여개에 이른다. 지역 내 이처럼 많은 산성을 가진 도시는 전국에서 대전이 유일하다.
그래서 대전을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 '산성의 도시'이다. 그렇다면 대전의 산성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았을까?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 대전지역은 '신흔국'이라 불리는 마한의 54개 소국 중 하나였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 남쪽의 마한지역이 백제땅으로 흡수됐고, '신흔국'도 이 시기 백제에 흡수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백제의 영토였지만 수도 한성과 거리를 두고 있던 대전지역은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위해 백제의 한성을 공략했다. 고구려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사망하고 한성을 빼앗긴 백제는 서둘러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웅진은 차령산맥의 남쪽에 위치해 북쪽의 고구려를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며, 금강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수도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새로운 수도의 동쪽에 위치한 대전은 이 시기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새롭게 부각됐다.
대전은 신라와의 교류를 위한 교통로인 동시에 신라의 옥천, 보은지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교통로와 국경선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산성들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삼국사기>동성왕 20년(498) 7월에 사정성을 쌓고 고위 관리를 파견해 이곳을 지키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동성왕 23년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에 대한 대비책으로 성을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3년 동안 백제 땅 곳곳에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대전지역 또한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였다. 신라에서 웅진으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을 백제부흥군은 거점으로 삼았고 이에 신라군은 안전하게 물자와 병력 조달을 위해 반드시 이곳을 차지해야만 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대군이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하고 이후 당군에 의해 진현성을 함락해 웅진으로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이후 대전의 산성 중 일부는 고려, 조선까지 사용됐는데 그 중 계족산성은 대전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운영됐다.
현재 40여 개에 이르는 대전의 산성 중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은 정비를 목적으로 한 보문산성, 계족산성, 월평동산성의 3건이며 구제발굴로 이루어진 월평동유적 1건을 포함 4건에 불과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는 국가사적지 1곳, 시도기념물 23곳, 문화재자료로 14곳이 지정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도시와 함께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전의 산성은 지금은 비록 낡고 허물어져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역을 지키고 나라를 지켰던 의미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산성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져 오는데 매년 3월1일 공주시, 세종시, 유성구민이 모여 안산동 산성에서 안산산성제를 올리고 있으며, 산성축제, 산성지킴이 활동 등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산성을 알리고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정명자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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