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건양대 총장 |
그래서 호국의 날을 맞아 이렇듯 소중한 내 나라를 지켜낸 이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6·25전쟁 때 이 땅을 지키다 외롭게 숨진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 전쟁터에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13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한반도 어디에선가 죽은 몸으로 군화 끈도 풀지 못한 채 유골이 되어 흩어져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형제, 남편, 자식을 무한정 기다리다 명을 달리한 가족들도 부지기수일 테지만, 죽어서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많은 불귀의 원혼들이 이 땅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이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3년 한시로 유해 발굴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후 2007년 1월에는 정식으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발족시켜 본격적인 유해발굴에 나서게 되었다. 과학적 기법을 동원하고 발굴에 참여한 병사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불과 10여년 만에 모두 8000여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죽음은 육신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이며, 남은 육신에 대해서는 정성껏 장례를 치르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어떤 이유든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르는 것은 후손의 가장 큰 불효이자 부덕의 소치로 치부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후 아직 수습이 안 된 16 영혼의 시신을 가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그같은 뿌리 깊은 전통 때문이다.
따라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유해발굴사업에 정부가 발벗고 나선 것은 예학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손들이다. 그분들의 직계 후손들 역시 상당히 고령이 되어 하염없이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습한 8000여구의 시신 가운데 가족을 확인하여 제대로 인도 절차가 이루어진 것은 불과 91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유해가 발굴되면 유전자(DNA) 확인 절차를 거쳐 가족들에게 통보되고 대부분 국립묘지에 정성껏 안장해드리는 것이 순서로 되어 있다 한다.
그렇지만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지, 많은 후손들이 이미 타계해서인지, 아니면 손자대로 내려오면서 조상에 대한 관심이 옅어져서인지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숫자가 2만3000여 가족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렵게 유해를 수습하고도 대부분은 유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60여년의 세월을 땅속에 버려져 있다가 어렵게 유골이 수습되었는데도 유가족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인들에게 두 번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해 발굴과 함께 모든 당사자들이 유전자 등록에 참여하도록 적극 대국민 홍보에 나서야 한다. 산비탈 격전지에서 한삽 한삽 조심스레 떠내고 붓솔로 정성스레 흙을 털어내어 유해를 찾아내는 우리 병사들의 지극한 정성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발굴된 유해가 가족에게 인도될 수 있도록 더욱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6·25전쟁의 진정한 종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13만 전몰장병의 유해가 가족들에게 모두 인도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그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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