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인석 수필가 |
우리는 해마다 두 번씩 성대한 종교행사를 체험한다. 새 생명들이 피어나는 봄날엔 석탄일(釋誕日)을 맞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엔 성탄일(聖誕日)을 맞는다. 석가와 예수탄생을 기리는 두 종파의 의식행사는 해가 갈수록 성대해지고 있다. 세상 온 누리가 마치 자비와 사랑의 천국이듯, 봉축찬송행사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자비나 사랑을 추구하는 종파별 단체도 부지기수로 늘어났고, 또 석가나 예수이름 외쳐대는 종교인들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금방이라도 사바세계는 불국정토가 되고, 만백성에겐 화평한 세상이 열릴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세태는 역비례현상이다. 민심들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다. 찬송소리는 높아지는데 자비와 사랑은 더욱 메마르고 있다. 세상은 온통 시기 질투, 갈등 불신, 분열 분쟁으로 치닫고 있다. 개인적 갈등, 가정적 갈등, 사회적 갈등, 정치적 갈등, 세대 간 갈등, 지역 간 갈등, 이념적 갈등에 이어 종교 간의 갈등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불신갈등이 도처에서 자비와 사랑을 짓밟고 있다.
서로가 내가하면 선(善)이고 남이하면 악(惡)이다. 개혁을 떠드는 사람들이 개혁을 실천하지 못하고, 자비와 사랑을 소리치는 사람들이 자비도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윗선에 더욱 몰입하고 있으니, 자비대신 무명현상이 커지고, 사랑대신 증오현상이 커지고 있다. 무명현상은 불신을 양산하고, 증오현상은 분쟁유발을 반복하면서 누적되는 악순환이 자비도 사랑도 거역하고 있다. 누구들의 책임인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사명을 버린 채 권력만 탐하고 부정비리만 좇아다니듯, 종교인들 역시 진리를 망각한 채 엉뚱한 곳에 빠져 목청 돋우기 예사다. 세월호 참사가 정치집단의 불순한 계략에 이용되고, 반국가집단의 시위선동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자비가 위선(僞善)이 되고 사랑이 사술(詐術)이 되고 있다. 자비와 사랑은 어떤 논리도 변질될 수 없는 형이상학이다. 자비를 깨달음의 이념으로 세운 석가도, 또 사랑을 믿음의 이념으로 세운 예수도 중생들에게는 구원의 등대다.
그러나 자비이념을 내세우고, 사랑이념을 내세운 불교나 예수교 종교지도자들 일부가 사명의 영역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탈선해 등대구실을 외면하기 일쑤다. 종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툭하면 불순집단의 시위선동에 끼어들어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다. 민주국가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좌경이념이 자비인가, 내란음모획책이 사랑인가? 중생들의 감성을 이끄는 종교만큼 신성한 사명의 영역도 없다. 종교지도자들을 일러 성직자라 추앙하는 이유다.
성직자들의 구도자세가 바르면, 중생들은 자연히 믿고 따르게 된다. “윗물이 맑으면 아래 물도 맑다”는 속담은 교훈이다. 성직자들의 사명의식이 바로 설 때 각박해진 세태의 자비도 사랑도 바로 서게 되고, 양심과 정의도 바로 서게 된다. 요즘 일부 성직자들은 입으로는 자비와 사랑을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성직을 외면하기 예사다. 마치 우측깜빡이 켜고 좌측으로 달리는 위선정치를 닮아가고 있다. 자비와 사랑을 외치는 불가의 지도자는 누구들이고, 그리스도의 지도자는 누구들인가.
자비도 사랑도 양심과 정의로 실천된다. 정직한 자비, 공평한 사랑만이 진정한 화합이고, 진정한 정의이며, 진정한 믿음이 된다. 세태의 허욕과 탐욕을 치유하는 근본도 정직과 공평, 양심과 정의뿐이다. 우리는 툭하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떠든다. 큰 바위는 쉼 없이 자신을 부수고 깎아내려 낮은 계곡에 부드러운 흙을 채우며 뭇 생명들과 공존공생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 큰 바위처럼 양심과 정의를 외치는 종교가 바로서야 한다. 정의와 양심으로 수양된 자비와 사랑의 지도자가 절실한 때다. 며칠 전 또 한해의 석가탄신일이 지났다. 공존 공생하는 자비와 사랑의 이름을 다시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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