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경애 목원대 영문과 교수 |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연이어 있어 연휴의 횡재를 만나니 오랜만에 마음의 여유를 누려본다. 요란스럽게 놀러갈 기분은 아니니, 조용히 산책도 하고 명상도 하고 싶어 집 근처에 있는 수목원에 들렀다. 10년 전쯤 이었을까? 수목원이 생겼다고 해서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나무들이 어리고 주변 정리가 안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늘도 없고 쉴만한 시설도 부족해 무척 실망하고 돌아간 기억이 있다. 그 후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잘 정비된 천변 자전거 길을 달려가며 보니 오른쪽 길가에는 빨강, 노랑, 분홍, 하양, 보라, 알록달록 들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푸른 잎사귀들은 형형색색 갖가지 아름다운 초록을 과시한다. 왼쪽에는 강물이 햇빛을 받아 물결이 반짝반짝 눈부시다. 가끔 집단 이주에 끼지 않고 남아 살고 있는 청둥오리도 눈에 띄고, 제법 맑아진 강물에 물고기도 많아졌는지 나른하게 앉아 있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띄엄띄엄 보인다.
수목원은 입구가 여러 곳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조용하고 한적해 보이는 곳을 택해 들어갔다. 그 순간 별천지가 열렸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양 길가에는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참나무, 밤나무, 회화나무, 물푸레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숲의 향기가 난다. 어디선가 새들이 요란하지 않게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아아, 어떤 향수가 이보다 더 향기로우며 어떤 음악 소리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조금 더 걸어가니 고요한 연못에 수련이 한창 피어 있고, 그 옆 화단에는 패랭이꽃, 데이지, 꽃잔디, 디기틸리스, 그리고 그 건너에는 소담한 작약과 모란꽃들이 화려한 모습을 뽐낸다. 샛길로 접어드니 아치형 터널에 붉은인동이 넝쿨져 올라가며 꽃봉오리를 잔뜩 머금고 있다.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터널을 지나니 널찍하면서도 아늑한 잔디밭이 나오고 군데군데 벤치가 보인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아 본다. 꽃향기, 따스한 햇볕, 살랑살랑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 오래전 학창시절에 외우던 'Who has seen the wind?' (크리스티나 로제티, 영국의 여류시인) 라는 예쁜 시 한 편이 떠오른다.
Who has seen the wind?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Neither you nor I.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요.)
But when the trees hang trembling (그러나 나뭇가지들이 매달려 흔들리면)
the wind is passing through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Who has seen the wind?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Neither I nor you.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지요.)
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그러나 나뭇가지들이 고개를 숙이면)
The wind is passing by.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이 향기롭고 부드러운 바람은 천사들이 지나가며 만드는 바람일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간 어린 영혼들이 이 아름다운 곳에서 천사가 되어 부드러운 바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어찌 그렇게 생각 없는 어른들이 많은지. 이기적인 마음들이 횡행하는지. 선진국, 선진국 하면서도 사람들의 정신은 왜 이리도 피폐해졌는지.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통한 발전이 진정한 발전이며 진정한 선진인데 우리의 도덕과 윤리의식은 여전히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정신교육의 부재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됐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이러한 참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의식화된 선진 국민을 위한 정신교육체제를 재정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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