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뜻만 보고 낮잡아 이르는 말로 풀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지닌 값보다 낮게 쳐서' 자기 자식에게 “아이고, 울 애기. 내 새끼”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배 아파 낳은 자식, 자식보다 더 예쁘다는 손자와 손녀에게 정을 꽉 차게 가득 담아야만 써지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새끼'다. 갑자기 하숙집 아주머니가 옆방 의대생에게 “내 새끼가 왜 새끼야?” 하고 큰소리로 따지던 모순어법 같은 말이 생각난다. 고등학생 아들에게 '새끼'라 불러 생긴 사단이었다.
평소 내 앞에서 교양미를 은근히 뽐내던 아주머니가 격하게 화를 냈던 것은 '새끼'가 '어떤 사람을 욕하는 말'③이기 때문이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이상호 기자가 다른 기자에게 썼던 “새끼”도 전형적인 ③에 가깝다. 비록 '개××'에 부글부글 끓는 공분이 가미됐고 허위와 과대의 정곡을 찔렀을지라도 그것은 욕이다. 이해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다르다. 쌍욕, 익살욕, 채찍욕 어디에 분류되든 욕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기자가 공식 사과한 데는 '아무리 그래도 욕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문자를 보낸 그의 아들―아마 ②의 '새끼'에 해당할―영향이 컸을 것이다.
10년 전 나온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는 영화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중 잊히지 않는 것은 시합 도중 실컷 두들겨 맞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여성 복서 매기의 귀 언저리에 대고 트레이너인 프랭키가 나지막이 말하는 부분이다. “오, 마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기면 받을 백만 달러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두둑한 개런티보다 친딸 같은 복서의 생명이 더 귀하다는 의미였다. 자막에 “내 백만 달러 아기” 아닌 “금쪽같은 내 새끼”라고 의역돼 영화 내용보다 번역 솜씨에 훈훈해지던 감흥이 되살아난다.
부모가(또는 조부모가) 쓰는 '새끼'는 자식을 낮잡는다는 ②이기에 앞서 심정적으로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짐승'①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럴 때 '새끼' 사랑은 거의 동물적이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기도 하다. 안전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다. 안전이 위협받을 때, 욕(欲)이 채워지지 않을 때 나오는 소리가 욕(辱) 아니던가. 정부가 욕먹는 이유도 안전이 흔들려서다. 욕됨의 근원을 해체시킬 시원한 욕은 어디 없는가. 욕보임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새끼를 두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 원망의 바다를 보며 “내 새끼 살려줘.” 울부짖다 실신한 부모, “내 새끼 찾아와”라며 애타게 통곡하는 모정. “내 새끼 어디 가.” 운구차를 뒤쫓는 할머니 들의 절망, 울분, 탄식. '금쪽같은 내 새끼'는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들에겐 너무 가혹하고 절절한 슬픔의 언어다. '새끼'가 '자식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니, 사전의 정의도 무조건 따를 지침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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