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일제 강점기 말 선전(鮮展)에서 입상한 젊은 화가 이동훈 선생은 광복 다음해(46년)에 대전역전 미국공보원에서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인 47년에는 전국학생미술작품 공모전을 열었다. 그 때 입상한 학생들(이남규, 최종태)이 뒤에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자랐다. 그는 해마다 또는 한 해 걸러 개인전을 열며 대전의 화단을 이끌었다. 화가를 지망하는 교사들을 찾아 함께 스케치에 나가고 개인전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그림 그리는 제자들을 데리고 유성 등 교외 이곳저곳 찾아가 그림을 그렸다. 이 때의 철저한 개인지도를 받은 송진세, 유우현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상(像)미술회'를 만들어 지금도 매년 서울에서 동인전을 열고 있다. 이동훈 화백은 한국 구상화의 중진으로 뒤에 수도사대(세종대)교수로 옮겨갔다.
한국 최초로 미국에서 작곡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한 구두회 선생이 젊은 날 대전에서 음악교사로 작곡가의 새싹을 길러낸 것은 대전의 행운이었다. 그는 숙명여대 교수로 가기 전 거친 대전 땅에서 학생들에게 화성학 등 작곡이론을 가르쳤다. 기초도 없는 중학교 과정의 학생들에게 작곡이론을 가르치는 일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작곡가의 황무지를 개척할 인재양성을 늦출 수 없다면서 열중했다. 대전사범은 '한국 아동음악 작곡가의 요람'이 되었다. 이문주, 박준식, 이창규 등은 한국아동음악작곡가협회를 결성하고 이끌어 가는데 주축이 되어왔다. 그는 대전의 노래를 작곡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작곡한 정훈 선생의 시에 곡을 붙인 '첩첩 산으로 가자'는 대전에 심은 대전의 노래였다. 폐허의 도시 대전에는 늘 아름다운 음악이 이어졌다. 매주 또는 매월 서창선 선생이 이끄는 정기 음악 감상회와 경찰악단의 정기연주는 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문학사랑 제자사랑이 남달랐던 시인 한성기 선생은 대전 문단을 열어 이끌었다. 대전의 문학인들 모임도 주로 그가 맡아 추진했다. 젊은 시인들의 시화전을 위해 화가를 찾아가고 전람회 장소를 물색하는 일까지도 자기 일처럼 나서서 주선하곤 하였다. 가끔 교단의 수업에서 쏟아내던 열정이 식지 않을 때면 제자를 집으로 데리고 가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문협 충남지부 결성을 주도하고 협회 회보와 잡지를 내는 일도 손수 도맡았다. 학생작품을 들고 신문사를 자주 찾아다녔다. 처음으로 활자로 찍혀 나온 자기 글을 보고 힘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소설가 이규희, 조선작, 시인 안명호, 정광수, 최문자, 동화작가 서석규 장욱순, 한상수….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당시 중도일보에는 편집국장에 소설가 추식 선생, 취재부장에 희곡작가 임희재 선생이 있었다. 두 분은 지역문학행사에도 참여하고 학생들의 작품을 자주 지면에 실어 새로운 힘을 얻게 했다.
힘겨웠던 전후의 혼란 속에서 대전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세 분 스승은 공교롭게도 토박이 대전 사람이 아니었다. (이동훈-평안도, 한성기-함경도, 구두회-공주ㆍ평양에서 수학) 전국 곳곳 사람들이 고루 모여 열정을 불태워 싹을 틔우고 가꾼 '한밭문화'. 더 아름답고 우람한 거목으로 자라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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