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헌오 대전문학관장 |
단순하고 극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변해야 산다”고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인지 많은 입사시험의 경우 지성인보다 지능인을 뽑게 되고, 학교교육도 능률지향, 기능지향, 지능적 경쟁지향에 초점이 맞춰져 인성교육이 축소되고, 인문학의 퇴조를 부추긴다. 속도를 빨리 하려면 2분법에 의존해야 한다. 맞기 아니면 틀리기, 좋기 아니면 나쁘기, 내편 아니면 남의 편, 극단적으로 신속한 판단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버려야 홀가분하게 갈 수 있다. 엄청난 희생과 위험부담을 각오하면서 저항은 잔인하게 물리쳐야 한다, 불행한 사회가 된다.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저개발 사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낮아지는 것이다.
속도만 중시하다가 잘못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빨리 달려가면 더 멀리 벗어나버린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지거나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만 제자리에 올 수 있게 된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연의 파괴, 무고한 생명의 희생, 엄청난 자원의 낭비,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적 타락, 소중한 문화유산의 훼손, 어처구니없는 가치관의 붕괴가 초래될 수도 있다.
지능주의 내지 기능주의 사회는 기계적 능률을 지향하고, 기계주의는 인간의 소외와 절망을 가속화시키면서 기계를 위한 인간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인문학의 쇠퇴로 대학에서 사라져가는 학과가 늘어난다. 지성의 상아탑을 포기하고 지능과 기능의 기계적 인재만 양산할 날이 온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이 기업들이 추구하는 가치요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인간에게 진정한 삶의 희망이 무엇일까? 생산만을 위한 사람을 양성한다면 언젠가 그들은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불행한 것은 못참겠다”고 실토하게 될 것이다. 도를 넘어선 이기주의는 화폐를 위한 인간을 만들고, 화폐에 지배당하는 일생을 산다면 신성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닐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거과정에서도 실현불가능한 일까지 다 해내겠다고 속이고 휘말리도록 술수를 쓴다면 자칫 시민들에게 꼭두각시 역할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본래의 질서를 간과한 채 임시적 질서에 의존해 살아가는 불안과 유한성을 고치려면 자연성과 인간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는 자연 질서의 변질을 만들어 가는 인간의 범죄는 무수히 자행되고 있다. 아인슈타인 범죄가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수억 배의 잠재적 파괴력이 미봉되어 있다. 날마다 하늘높이 쌓여 올라가는 시멘트와 화학재료의 아파트들은 자연이 수용할만한 처리용량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언젠가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오염물이 범람하고,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질서가 붕괴되며, 걷잡을 수 없는 파괴로 종말을 향해 치달을 수 있다.
대전시에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옛 충남도청사를 빌려서 운영하는 시민대학에 올해 봄학기에는 1만7000여 명이 등록해 수강하고 있다. 150만명 대전시민의 1%를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얘기이다. 성인중심의 교육운영에 교통 불편도 감수하면서 이만한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평생교육이 시민복지에 얼마나 절실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우리 사회나 기업들도 인문학적 지성이 필요한 자리를 만들어 '지성을 갖춘 인재'를 선택하는 바람을 일으키면 교육의 방향도 그에 합당하게 바뀔 것이다.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 변화속도의 조절도 필요하다. 사회적 가치관이 지성과 정의와 진리에 합당하도록 늘 지키고 회귀시켜야 한다. 그래서 행복지수를 높이고, 아름다움과 쾌적함과 따뜻한 인간애가 반영되는 환경과 질서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후손 대대로 상생의 질서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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