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균 대전문화재단 사무처장 |
비슷한 시기였던 19살 시절. 족히 45도가 넘었던 가파른 시민회관 2층 객석에서 성악가의 연주를 들었다. 메조소프라노의 굵은 목소리로 들었던 김연준 작곡의 '비가'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흐르게 했다. 그때의 감동은 수백단어의 수식어로도 표현 못하는 그런 감동이었다. 클래식 기타를 메고 대회에 출전해서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막스 브루흐의 'Kol Nidrei'를 들으며 빗줄기 속으로 빠져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음악과를 지망하고 있었던 필자는 아마 장르를 초월한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했었던 것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면서 시립합창단에 입단을 하고 오페라단의 행정 일을 해가며 합창과 독창, 오페라단역 등으로 많은 무대 경험을 쌓았다. 프로가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는 관객을 상대로 자신을 마케팅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부담스럽다. 연습과정이 어렵고 쉬움을 떠나 결과에 만족할 때도 있고 때로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공연장을 도망 나오듯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다. 무대는 무섭다. 그만큼 관객들은 냉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대에 설 때나 기획자가 돼서 공연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자들은 공연장에서의 기(氣)를 느껴보셨는지 모르겠다. 객석의 맨 뒤에서 무대로 향하고 있는 기(氣)를 느낄 때의 희열. 매번 적자를 거듭하면서도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그 희열로 자위 받기 때문인 것이다. 반면, 적자도 나고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별로 맘에 들지 않을 때 얻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전에서는 정말 많은 예술가와 예술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상실감과 희열을 반복하면서 중앙과의 격차를 좁히고 있고 시민들에게 문화를 향유하는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술에 항상 최고만 있을 수는 없지만 관객은 항상 최고를 원하거나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길 원한다. 항상 겸손하며 무대를 두려워하는 음악가가 많을수록 관객도 많아지고 행위도 많아지는 선순환구조가 이루어진다. 관객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보조금만으로 자기만족을 하는 예술가가 많아진다면 관객들이 이들의 행위를 외면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과거에는 워낙 중앙과의 격차가 심해서 지역예술가들의 행위가 집안잔치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중앙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지역예술가와 전문단체들이 많아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조금에 의지하는 음악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예술장르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화융성이 현 정부의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이고 지역문화진흥법의 제정으로 많은 기대를 나타내고 있지만 문화의 핵심인 예술은 총체적 위기다. 지방대학교의 예술관련 학과들은 전과 또는 폐과가 되고 있고, 예술의 수월성(秀越性)은 점점 관심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감동 받는 젊은이가 많아지고 좋은 공연과 전시로 감동받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생활예술도 발전한다. 문화예술은 혁명으로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우리 모두 냉정해져야 한다. 예술가들은 관객을 두려워하며 자신과 싸워야하고, 애호가들은 냉정한 비판과 박수를 아끼지 않으며 지고지난 한 세월이 흘러야 한다. 최고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예술가와 장인 정신이 있는 예술가들이 존경받아야만 진정한 예술적 감수성을 전수받는 시민들이 많아지리라 본다. 통섭을 논하고 융복합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예술의 수월성만큼은 독립적으로 존중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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