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만약 우리에게 6세기의 계획도시 사비(부여)에서 발굴된 바둑판 모양의 도로가 전승됐다면 그들처럼 썼을지 모른다. 시간에서 '간(間)'이라는 공간성을 보는 민족 심성에 비춰 왠지 안 그랬을 것도 같다. 도로가 주소가 되려면 최소한 대전 으능정이거리처럼 삶의 교감이 흐르는 일상공간인 '가로' 개념을 충족시켜야 한다. 아산 온천동이 어느 날 시민로라고 호명되는 순간, 기점과 종점을 잇는 교통시설이 된다.
비교적 덜 '억지사지(抑止―)'인 경우는 둔산, 노은지구 등 신도심이다. 한자 '街'(가)에서도 '行'(행)의 형상은 곧 구획 잘된 네거리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과 한적한 시골길에서 만난 도로명은 그렇지 않다. 아시안 하이웨이 AH1(일본~터키) 이정표를 경부고속도로에서 마주쳤을 때의 비현실감을 환기시킨다. 건축가 루이스 칸이 강에 비유한 도로의 속성과 존재감이 마구 살아나고 있다. 김장철이면 배추를 사러 다니던 금남면 장재리 마을은 길재길이라는 길이 됐다.
하지만 주소는 이동경로가 아니다. 주소는 우선 행정구역의 집합체다. 그 틀이 깨지니 제일 편리해진다던 택배업자들이 제일 고생한다. 뇌 구조상 방향감각과 공간인식 능력이 약한 여자 쪽 마음고생이 더하다. 남자는 이 여자 저 여자 흘끔거리며 길은 조금 잘 찾는다. 신문사에 오는 우편물이 안녕한 것은 물론 집배원이 남자여서는 아니다. '중도일보' 위치에 빠삭한 집배원의 노고 덕분이지 '계룡로 832번길'의 효율성 때문은 더욱 아니다. 짜장면을 시켜도 옛 지번주소를 어림해 배달하고 택시기사들은 새 주소 행선지를 대는 승객 못 봤다며 콧방귀 뀐다. 그보다 도로명이 온 국민을 길치로 만들고 있다. 내비게이션 탓할 것 없다.
오늘 칼럼을 쓰기 위해 내비게이션 없이 뇌에는 블라인드를 치고 대전 우남스타원아파트를 찾아봤다. 대둔산로 301→산서로 25→산서로 21→안영로 68번길을 더듬더듬 따라간 길은 미로 찾기 수준이었다. 빤히 대둔산로 일직선상의 271번길 곁인데 참 복잡다기했다. 이건 약과다. 중구 대사동네거리에서 서구를 거쳐 유성구 구암교삼거리를 잇는 계룡로의 뒷골목을 헤매다 보면 진땀이 다 솟는다.
이 땀이 진정 가치 있는 땀이 될지는 확신이 안 선다. 거기에다 기관명은 남고 건물명과 아파트명은 사라졌다. 지방행정체제 개편도 하기 전에 면 단위는 넣고 동은 빼버린 자의성은 주소 불완전성의 증폭장치다. 중심거리 통(通), 거주지 정(町)과 더불어 조선인 집단거주지 동(洞)을 정한 '일제 잔재' 탓할 게 아니다. 입에 짝짝 붙는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로 바꾼 건 그럼 미국 잔재인가. 우리 '주민센터'와 일본 '시민센타(市民センタ―)'는 뭐가 다를까.
그런 건 두고라도 '동'은 여전히 주민생활의 근간을 이룬다. 가령 대전이 자랑하는 복지만두레도 동 단위다. 지리적으로는 도시 내 위치의 대략을 짚어준다. 툭하면 들이대는 'OECD 기준'이 그렇게나 부러웠으면 애비뉴 개념으로 '계룡로(Gyeryong Ave.) 15번가(15th St.)' 등 큰 덩어리로 나눌 걸 그랬다. 건물번호 1이 10m 간격이란 설명은 미터 감각이 무딘 한국인에겐 과잉친절이다. 부동산 거래를 해보면 토지의 고유성 하나 온전히 못 분간해 신구 두 주소를 나란히 쓴다. 온 국민이 길 위로 내몰린 신세가 되자 생긴 일들이다.
반쪽짜리 주소는 알아도 안 게 아니다. 주소나 이름을 모르고 찾는 '남대문입납(南大門入納)', 간혹 그 꼴이 된다. 다시 봐도 당진 채운동은 2차원, 백암로는 1차원이다. 생활 터전이 이미 공간이고 면인 것, 편리하다고 홍보하지만 불편한 진짜 이유에 솔직해지자. '민증'에 선형 주소(도로명주소) 스티커 뚝딱 붙여 지방선거 치르면 면형 사고(面型 思考)로 싹 바뀔 그런 성질이 아니다. 길 안내용 이정표와 실거주소인 주소의 차이는 엄연하다. 주소 정책이 번지수를 찾기 힘들면 차라리 올 1년을 시험사용기간으로 삼자고 정식 제안한다. 실패보다 뒷북이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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