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석규 문화칼럼니스트 |
나는 가끔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열정에 들떴던 그 무렵의 대전을 생각한다. 어느 도시보다 가혹했던 대전의 폐허, 그 거친 도시에 '문화의 샘'을 파고 '문화의 불씨'를 지피던 대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리고 그 분들의 뒤를 따라 다니던 '행복한 나의 대전시절'에 취한다. 1955년 무렵 대전에서는 '문학의 밤' '작품 낭독회' '시화전' 같은 문학행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대전의 문인 사회가 방황을 멈추고 작은 모임을 시작한 것은 1952년. 자주 모이면서 등단의 용트림이 시작됐다. 문학도들에게 교과서 같은 구실을 하던 유일의 순수 문예지 '문예(文藝, 53년 3월)'의 소설 추천을 마치고 등단한 권선근 선생에 이어 대전 문단에 큰 활력소를 불어 넣은 것은 55년이었다. 시에서 52년과 53년에 각각 1, 2회를 거친 한성기 선생이 이 해 4월에 3회 추천을 마쳤고, 소설에서 추식 선생이 1월 1회에 이어 5월에 추천을 마쳤고, 시에서 박용래 선생이 55년에 1회, 56년 1월 2회에 이어 56년 4월에 추천과정을 마치고 등단하였다. 이희철 선생이 55년 종합 월간지 '신태양'에서 공모하는 전국학생문예작품현상모집 시 부문에서 당선되었다.
주춤거리던 신문사의 신춘문예현상모집이 한꺼번에 시작된 것도 55년(모집:54년말)이었다. 이 해에 임희재 선생의 희곡이 조선일보에서 당선됐고, 서석규의 동화가 한국일보에서 당선됐다.
대전의 젊은 문학인들이 모여 한국문학가협회 충남지부를 발족시킨 것도 이 해 7월 17일이었다. 대전문화원에서 있었던 창립총회에서 회장 이재복, 시분과 한성기, 소설분과 권선근, 희곡분과 임희재 선생이 각각 분과회장을 맡았다. 총회의 시발을 알리는 '충남 문협회보' 제 1호(8.6)에 이어 연말까지 4호를 발간했다. 이 회보의 편집은 협회 결성을 주도했던 한성기 선생이 맡고, 등사해서 배포하는 일은 정재수 선생이 맡았다. 이듬해인 56년 3월 1일자로 창간한 협회 잡지 '호서문단(湖西文壇)도 문학과 문단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한성기 선생의 봉사로 이루어졌다. 이 때 회원은 40명(대전-23 공주-9 기타지역-8)이었다. 더 넓은 서울에 가서 제대로 글을 쓰자며 중도일보 세 사람(추식 임희재 서석규)이 대전을 떠나 서울의 작은 여관방 생활을 시작한 것은 56년 1월이었다.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전국 어느 도시보다 활기에 찼던 이 시기를 우리는 '대전의 르네상스'시대라 부른다. 전국 여러 고을의 그 무렵 문화풍토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대전만큼 열정에 충만했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무렵 '대전의 문학과 미술과 음악의 개척사'에 놀란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형성한 일본인 중심의 대전에 '우리문화의 한밭'을 일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년이 흘렀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