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토크]할머니 미용사의 멋진 판타지

  • 오피니언
  • 문화칼럼

[문화토크]할머니 미용사의 멋진 판타지

최충식 문화토크

  • 승인 2014-03-16 08:37
  • 신문게재 2014-03-17 17면
  • 최충식 논설실장최충식 논설실장
남자들에게는 오빠 판타지가 있다. 의심나면 입을 똥그랗게 모아 '오빠'라고 불러보라. 옛날에는 버스안내양 판타지가 있었다. 육감적인 미용사에 꽂힌 사춘기 소년이 '미용사 남편'이고 싶은 열망을 중년에 기어이 이루는 영화도 있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판타지.

원제(Le Mari de la Coiffeuse)가 '미용사의 남편'쯤 되는 프랑스 영화다. 이발소나 미용실에서 샴푸할 때 기분 좋은 나른함을 즐기는 남자라면 격하게 공감할 영화다. 여자를 알기 전, 엄마 외에 자기 머리를 감겨주는 유일한 여자가 미용사라는 '비밀'을 생각해봤다면 말이다.

지난 토요일(15일), 고려대병원에서 누나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근처 미용실에 들렀다. 그렇다고 남자 연예인들이 단골인 청담동 미용실이나, 생애 최고의 커트를 했다 해서 로망 판타지를 연상했다간 금방 실망한다. 오늘의 현장은 미용사의 시어머니인가 싶은 연배의 할머니가 일직선으로 가로누워 있던 병원 근처의 허름한 미용실이 전부다. 처음엔 전도 나온 목사로 착각한 할머니도 흠칫 놀랐었다.

“아이고! 손님, 아깐 놀라셨죠? 할망구가 누워 있어서.”

머리통은 맡기고 눈동자만 굴려 거울을 본다. 거울조차 세월의 손때를 강렬하게 내뿜는 듯했다. 라캉의 '거울단계적 공간'에서 머리가 만져지는 촉각을 느끼고 자신의 사회적 자아가 잘 연출되는지를 거울로 감시한다던가. 사실 그런 개똥 심리학보다 미용사의 사명이라는 '시대 풍조를 건전하게 지도(문화적 측면)'가 좀 웃음이 나면서도 더 마음에 든다.

그 미용사는 아무튼 22살 처녀 적에 미용기술을 배워 27살부터 44년간 한자리를 지키면서 그 건물도 사들였다 했다. (미용실 10년 생존율은 29.6%, 평균 존속기간은 3.0년이다.) 모든 것이 오래 묵은 익숙함과 막 생긴 낯섦의 충돌 그것이었다. 짧은 시간 쏟아낸 이야기만으로 한국판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한 편은 찍음직했다. 압축파일 같은 진기한 이야기들은 아껴두고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한다. 찍은 사진도 미공개다.

머리 자르기, 다듬기가 끝나고 세면기 쪽으로 걸음을 떼던 참이었다.

“원래 머리 안 감지요, 우리 집은.”

미용실의 요체는 머리 감기인데, 머리 깎기는 머리를 감기 위한 예비행위에 불과한데….

“머리는 우리 영감도 안 감겨줘. 흐흐. 대신 커트비 4000원만 받아요. 이리 와봐요. 서비스로 특별히 감겨줄 테니.”

난감한 표정을 지어서였는지, 습관대로 '선생님'이라 불러줘 감격했는지 허리가 약간 구붓해진 미용사는 낡은 온수 밸브를 켰다. 잠깐 소견을 밝히면, 미용은 표현과 소재의 선택이 제한된 부용예술(附庸藝術)이라지만 회화나 조각 등 자유예술에 뒤지지 않는다. 미용사는 미용학을 전공한 예술가다. 게다가 할머니 미용사는 수수하지만 기술적 지성, 그런 게 있었다.

“교수 양반이신가? 공무원 나리신가? 여기 올 일 있으면 또 들러요.”

“그럴게요. 동묘앞역에서 6호선 환승하면 요 앞 안암역까지 얼마 안 걸려요.”

어둠침침한 미용실을 빠져나오는데 미용사 아내가 죽고 나서 '늙은 소년' 앙트완이 추는 허망한 배꼽춤이 어른거렸다. 남자는 영원한 소년인가. 연모하던 동네 미용사 셰퍼 부인이나 미용사 아내 마틸드를 향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할머니 미용사를 엄마 외에, 아내 외에 머리를 감겨준 합법적인 '여자들' 반열에 올렸다. 미용사 판타지? 아무래도 좋다. 노라 에프린의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나 한번 읽으려 한다.

논설실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5.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1.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2.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3.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4.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5.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